2011년의 일주일은 신종플루 때문에 정말 집에만 꼭 갇혀있었고,
그 다음 일주일은 나의 애증의 도시,
일산- 그것도
사법연수원에서 보냈다.
나 잘아는 친구들은 "
일산 트라우마"라고 할 정도로 -
내게 일산은 정말이지 이런 저런 기억과 나의 개인적인 느낌들이 뒤섞인,
서울 다음으로 잘 알면서도 모르고 싶은-
좋아하고 싶지만 좋아할 수 없었던 그런 -, 그런.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 일주일간의 연수원 생활, 더 정확히 말하면 일산에서의 생활이 어떨지 차마 상상조차 해볼 수 없었다.
일주일이 아주 짧은 것도 같았는데
낯선 환경에서의 일주일은 정말 하루하루가 길고도 빠듯하게 지나간 것 같다.
연수원 시간표처럼 아침 10시부터 강의가 시작하고, 12시에 점심먹고, 1시 반부터 오후 강의를 듣고-
그리고 3시 10분부터는 기록작성이나 주어진 문제 풀이를 하고 - 그렇게 일주일을 꽉 채워보냈다.
노을이 지는 기숙사 복도
붉은 빛으로 가득한 복도는 몽환적이었다.
낯선 환경이기도 했고, '사법연수원'이라는 이름자체에서 오는 무게감때문인지, 첫날 둘째날은 조금 긴장해있었던 것 같다.
처음 받아보는 22페이지 짜리 기록도 머리가 지끈거렸고, 첫째나 받았던 숙제가 가장 난감하고 어려워서였는지
첫날 들어보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는 자체드롭해버린 1학년들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담임교수님께서 감사하게도 우리들이 낯선 곳에서 어색하고 긴장할까봐 다독여주시고
생각보다 연수원교수님들께서 많이 신경써주셔서, 조금씩 조금씩 마음이 놓였다.
사실 입소하기 전에는 도대체 연수원에서 왜 우리를 불러다 가르쳐주려는 건지,
연수원 교수님들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지, 어떻게 대해주실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한편으로, 나는 당당하게 새로 만들어진 제도를 선택한 것인데
왜 기존의 제도권 사람들에게 바짝 경계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하얗게 얼어버린 호수공원,
복작복작한 점심시간, 샌드위치와 커피를 들곤 혼자 호수공원에서 햇살을 즐겼다.
그동안 - 일산에서만큼은 난 항상 손님이었다.
내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난 일산에 갔었고, 항상 안내를 받았고, 마중과 배웅을 받았다.
그렇게 많이 오가면서 항상 나도 일산에 초대받은 손님이 아니라, 바로 여기 사람이길 바랐던 적이 있었다. 어릴때. 5년전 쯤에.
그래서 여름밤에 편한 차림으로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사서 근처 호수공원의 호숫가에 걸터앉아,
여름 밤 호수바람을 맞으면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면서 친한 친구들과 소소한 얘기를 나누고는
손 흔들고 헤어져서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며 밤 하늘에 뜬 별을 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꿈을 꿨다.
목요일 점심 땐, 학교 사람들과의 복작복작한 점심시간을 피해
카페라떼 한잔과
샌드위치를 사들고는 혼자
호수공원에 갔다.
5년 만에 마주하는 호수공원, 항상 누군가의 인도로 찾아왔던 여기, 이제는 나 혼자 나만의 여유를 즐기러 오게 되다니.
호수는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나는 햇볕이 바로 드는 계단에 걸터앉아서, 하얀 들판같은 호수공원 풍경을 보면서
커피를 한 모금, 샌드위치를 한 입, 커피를 한 모금.
좋았다.
짧았지만- 그 짧은 순간 평온하고, 행복했다.
..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이젠 제법 두꺼운 기록을 보는 것도 겁먹지 않게 되었고
아무도 가르쳐준 적이 없지만 내 힘으로 소장도 써보고,
오후에 나오는 숙제도 풀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만, 그 모든걸 손으로 써서내야 한다는 엄청난 부담감은 있었지만 말이다.
알고보니, 오직 우리 반만 수기로 개인과제를 써서 냈다고 한다.
어쩐지, 다른 반 애들은 저녁마다 놀러나가고 영화관가고 술마시러 가는게 이상했는데
우리반만 죽어라고 손으로 숙제를 하고 있었다니.
거기다가 6명으로 맞춰준 우리 팀원중에 4명이나 중도이탈을 해버려서, 팀숙제까지 두명이 맡게 되서
정말, 월화수목 내내 밤늦도록 숙제만 했다.
원래 계획은 연수원들어가서도 민 3부분 예습하는게 목표였는데, 숙제가 좀 짧았던 수요일 하루 빼곤
매일 밤을 숙제하다가 다 보냈다. 그래도 임대차와 채권자대위의 쟁점이 되는 모든 판례를 내 손으로 찾아 써봤으니
제대로 공부는 되었겠지.
궁극의 수기 13장의 채권자대위 숙제. 제출할때 복사본이라도 만들어두고 싶었다.
또 하나, 연수원에 있어서 좋았던 점은 -
기숙사생활이 큰 부분을 차지 했다.
자취에 목말라있는 내게 집에서 떨어져 나와 기숙사 생활을 하는건 오랜만에 느끼는 정신적자유랄까.
게다가 룸메이트가 하루만 하고는 서울로 돌아가버려서 남은 연수원 생활을 모두 혼자 했는데
정적이 감도는 방안에서 혼자 사각사각 공부하는 느낌도 좋았고, 어쨌든 나만의 자치 공간을 갖게 되어서 정말 좋았다.
(물론 지금도 내 방은 내 자치공간이지만, 엄마가 들락날락 하는 것도-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도 나는 참 별로다. )
뿌연 하늘의 금요일 아침
연수원에 있었던 일주일은 날씨가 계속 화창했는데, 단 하루 금요일만 날씨가 좀 흐렸다.
그 13장의 수기로 작성한 개인과제와 아침 일찍 일어나 완성한 팀 과제를 제출하고 나서
따뜻한 물에 씻고선 또 하루를 준비하려 방에 들어왔는데 조용한 아침 풍경이 참 좋았다.
침대 위에 올려놓은 아이폰에서는 maroon 5의 just a feeling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블라인드 사이로 뿌연 아침하늘과 그래도 붉게 타오르는 아침해가 보였고
가습기의 뿌연 수증기가 그 햇살을 가려 왠지 모르게 그 순간을 아련하게 만들었다.
그냥 그런 순간들이 좋았던 것 같다.
조용하고, 세상에 나밖에 없는 느낌. 내가 느끼는게 전부인 그런 느낌-
사법연수원 본관 1층의 사진전
사법연수원 본관 1층 '미네르바'라는 전시장에는 연수원 사진콘테스의 수상작과 출품작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강의가 시작하기 전에 잠시 짬을 내서 둘러보았는데 좋은 사진들이 많았다.
연수원생들이 이 사진을 이 곳에 걸게되는 자격을 얻게되기까지 정말 자기의 감수성들을 죽여가면서 공부해왔을텐데도
그 와중에도 이렇게 자기 감성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작품 하나, 하나 - 누가 찍었는지, 무얼 찍은 건지 천천히 - 그리고 지그시 감상했다.
나도 - 아무리 공부에 치이고 지치더라도
그래도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내 눈을 잃지 말아야지.
민사 수업을 위해 가져갔던 교과서들.
마지막 숙제는 그 전 과제들에 비하면 간단했다. 지금까지 배운 요건사실론을 총 평가할 수 있는 빈칸채우기 문제들이었는데
요건사실에 맞춰서 청구 주장을 하거나, 판결서의 빈 부분을 채워넣는 그런 간단한 숙제였다.
처음으로 6시 안에 완성해서 제출하고는, 끝까지 남아있는 사람들과 수고했다며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고,
그리고 거기서도 끝까지 남은 사람들과 가볍게 맥주를 하며 오랜만에 수다를 떨곤 기숙사로 돌아왔다.
연수원측에서 2주일뒤에 있을 형사프로그램 사이의 1주일동안 기숙사를 연장해서 사용하게 해주었지만
운전면허 도로주행교습과 시험이 남아있는 나는, 눈물을 머금고 1주일간은 서울에서 지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자정이 넘어서 기숙사로 돌아와서 문을 열었을 때, 아무도 없는 깜깜한 방에 들어섰지만
나는 하나도 외롭지 않았다. 그것보다도 이제는 이렇게 아무도 없는 깜깜한 내 방에 들어가는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나를 더 아쉽게 만들었다. 여기서 밤새도록 숙제를 하는 것도,
아침에 눈뜨면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슬며서 미소짓는 것도,
다들 서울로 못돌아가서 안달이었는데,
유독 나는 여기가 너무 좋았다.
오늘, 아니 어제 아침. 해가 떴다.
이상하게도 저렇게 블라인드를 거쳐 들어오는 아침햇살이 참 좋더라.
다 좋았지만, 단 하나 불편했던 건
기숙사에서도 강의실에서도 인터넷이 안된다는 거......21세기, 그것도 2011년에 인터넷이 안되는 곳이 있다니.
덕분에 나는 판례도 죄다 아이폰으로 찾았고, 일주일 동안 미니홈피가 네이트고 외부 세상과 거의 격리되어 있었다.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사실 공부할때 검색하기가 어려운 거 말고는 인터넷이 안되서 오히려 좋았다. (....)
그리고 왠만한 여행하며 쪽잠자는데는 도가 터서
잠자리 바뀌는 것 때문에 잠을 못자지는 않는데
이상하게도 이번 일주일동안은 정말 꿈파티를 벌일정도였다.
꿈에서 내가 아는 로스쿨 사람들이 거의 다 출현했던 것 같고,
그래서 나는 항상 피곤했다. ..........(....)
어쨌든, 마지막으로 이원교수님(♥)의 강평강의를 듣고, 감사의 박수를 치고
1주일 동안의 사법연수원의 민사 프로그램이 그렇게 끝이 났다.
수업은 수업대로 알찼고 ,
개인적으로도 1학년때 공부한 민법과, 미리 예습해놓은 민법부분을 총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아서 너무 좋았다.
무엇보다도 학교 수업때문에 민법에 대한 흥미도가 떨어져가고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한번 민법에 대한 애정폭발의 기폭제가 되었달까.
법학이라는 학문자체에 대한 애정과 흥미, 재미도 덩달아 솟구쳤다.
그리고, 애증의 일산도 - 이젠 내게 누군가의 기억들이 휘저어 놓을 일 없는 "나의 - 애정의 일산"이 되었고.
게다가,
오랜만에 새로운 환경에 있어서였는지 마치 여행을 하고 온것처럼 refresh되고 현실과 분리된 그런 딴 세상에 있었던 그런 기분.
정말이지,
즐겁고 행복한 일주일이었다.
이젠 조금- 조금은 덜 무겁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