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럭저럭 행복하고 안정적지만 나는 나의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
계속 이렇게 살아도 나쁘지 않겠지만 이렇게 살기 싫은 마음.
헤멘지도 너무 오래라 그냥 여기 눌러앉아 길을 잃었다고 타령만 수년째 하는 나.
나아갈 길을 보고 걸어가고 싶은데 길이 보이지 않아.
보이지 않는 길이라도 걸어가야하는 걸까.
인생이 너무 어려운 서른넷.
그럭저럭 행복하고 안정적지만 나는 나의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
계속 이렇게 살아도 나쁘지 않겠지만 이렇게 살기 싫은 마음.
헤멘지도 너무 오래라 그냥 여기 눌러앉아 길을 잃었다고 타령만 수년째 하는 나.
나아갈 길을 보고 걸어가고 싶은데 길이 보이지 않아.
보이지 않는 길이라도 걸어가야하는 걸까.
인생이 너무 어려운 서른넷.
서른 넷도 이제 두 달이 채 남지 않았다.
아직은 젊은 나이에 더 가깝겠지만, 그렇다고 어린 것도 늙은 것도 아닌 어중간한 나이.
이 나이가 되어서 그런지, 결혼때문인 건지 아무런 생각이 없이 지나보낸 것 같은 2020년, 그리고 나의 서른 네살.
아무 생각 없음의 좋은 면은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고 (그래서인지 10년 가까이 날 괴롭히던 수면장애가 사라졌다.)
아무 생각 없음의 나쁜 점은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 생각이 없이 하루하루를 사는 와중에 가뭄에 단비처럼 나를 스치고 가는 짤막한 생각들의 모음.
#.
아무 생각이 없는 것 뿐만 아니라, 어떠한 감정, 어떠한 선호도 모두 사라져 버린 것 같다.
작은 일에 행복하고 작은 일에 슬프고 일희일비하며 오르락 내리락하던 감정이 이젠 추억처럼 남았다.
이젠 어떤 슬픈 노래를 듣고 가사에 귀 기울이고 옛 시절을 떠올려봐도 슬퍼지지가 않는다. (이 말이 행복해 죽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슬픈 감성에 젖어있는 나를, 그 순간을 많이 좋아하고 또 즐겼는데,
그리고 그 때 떠오르는 생각들과 술술 써내려가는 나의 글들이 좋았는데, (내 글의 No.1 팬은 나라고 장담한다.)
어느 순간 더이상 그런 감상에 젖어들기가 어렵다. 솔직하고 섬세한 그런 마음과 생각들이 더이상 마음과 손끝에 차오르지 않는다.
어쩌면 이제는 불안하지 않고 슬프지 않고 우울하지 않기 때문일텐데 -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내 안의 슬픔을 잃고 행복해진 대신, 글이 써지지 않는 섭섭한 슬픔을 얻었다.
그러는 와중에, 좋아하는 것. 그리고 좋아하는 마음도 같이 사라져 버린 것 같다.
입으로는 계속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고 하면서, 정작 하고 싶은게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 즐거운지 모르겠다.
적성, 그런 거창한 것 뿐만 아니라 요즘에는 취미생활조차도 무얼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반쯤은 코로나 때문에 못하게 되어서 사라진 것 같고, 반쯤은 내 안의 우선순위가 바뀌면서 사라져버린 것 같다.
그러므로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고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찾아보고, 시도해보고, 또 꾸준하게 해보려 노력해야 한다고.
할만큼 해보아서, 혹은 해봤더니 별 거 없어서, 혹은 해봤는데 귀찮아서의 이유로 이제는 아무런 시도조차 하지 않지만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해보자고 마음을 먹어본다.
(그래서 요즘 쓰고 싶은 얘기가 넘치는 건 아니지만 블로그에 계속 글을 써내려고 노력중이다)
#.
예전에는 퇴근하고 나면, 운동같은 취미활동을 하고 밖에서 데이트를 하고, 친구들을 만나면 연애얘기를 했다면
요즘에는 퇴근하고 나면, 집에와서 저녁식사를 같이 준비하고, 빨래와 청소같은 소소한 살림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면 부동산 얘기를 한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들 대화의 주제였던 꿈, 사랑, 낭만, 영화, 음악 같은 이야기들은 어디론가 모두 사라져버리고
이제는 부동산, 육아, 이직, 투자, 결혼과 같은 이야기들이 오고간다.
이제 나와 친구들은 엄마 아빠 어른들이 하던 이야기를 한다.
친구들은 이미 진작에 어른이 되었고, 나는 이제야 어른이 되었다.
사랑, 낭만, 영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내 삶에서 가장 현실적인 부분을 고민하고, 또 현실적인 주제를 얘기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좋고 싫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이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그 다음 단계로 넘어온 것 뿐이다.
내 안에서도 삶의 우선순위가 그렇게 자연스럽게 많이 바뀌어버렸다.
그러길 원해서도 아니고, 내 삶에 닥친 일들이라 그렇게 되어버렸다.
..에....그래서 삶에 재미와 흥미가 사라진건가 (O_O)?
그 때 듣던 노래들을 아무리 들어도 그 시절의 감성이 느껴지지 않는 서른 넷의 나이에.
이제는 너무 오래 전 이야기지만,
대학교 동기들과 밤새 팝송 가사 하나를 두고서 서로 다른 상상의 소설을 쓰고 견주던 시절이
다같이 몰려다니며 전시와 공연을 보고서 가볍게 소줏잔을 기울이며 오늘 본 것들에 대한 열띈 얘기를 하던 시절이
꿈같이 느껴진다.
우리 모두 다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 그런 이야기들로 밤을 지새우던 날들과 그 때의 마음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만 같다.
알람 없는 일요일 아침,
느즈막히 일어나 암막커튼을 걷어보니
하늘은 맑고 푸른데 창 밖의 커다란 황금빛 나무잎들이
바람에 싸아아아아 - 싸아아아아 - 마치 파도가 치는 듯 소리를 내며 찬란하게 흔들리고 있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서 내가 고른 첫 신혼집.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조건은 예산, 동네, 역까지의 거리, 회사까지의 이동거리, 그런 것들이었는데
(물론 그런 유용함은 매일매일 체감하고 있다)
이 집에 6개월 가량 살면서 느끼는 가장 큰 행복은
앞에 가릴 것 없이 시원하게 뚫려있는 공간과 그 사이 우리 창문까지 높게 뻗은 커다란 나무의 풍경이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푸르른 계절을, 가을에는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계절을 바로 눈 앞에서 감상하는 기분이란.
서울 한복판에 살고 있지만, 어떤 날에 교외에 있는 듯, 또 이렇게 바싹 마른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릴 때는
밴쿠버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가고싶다)
창틀에 앚아 저 커다란 나뭇잎들이 바람에 차르르 차르르 흔들리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 이 바람에 저 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한동안은 황량한 나뭇가지만 뻗어있을테고,
또 이런 풍경을 보려면 겨울과 봄과 여름의 사계의 시간을 모두 지나 보내야 하는구나.
그렇게 가을을 두 번 보고 나면, 어쩌면 이 곳을 떠나야만 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보니 너무 좋은 이 집의 단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내 집이 아니라는 것.
집주인은 이 집을 보지도 않고 샀다던데, 정말 운도 좋지.
같은 아파트라도 같은 동이라도 층 수에 따라 라인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다른데 어쩜 이 집을 딱 골랐을까?
여튼, 그렇게 생각하니 이 집에서 이런 풍경을 보며 지낼 수 있는 시간도 빠르게 줄어두는구나. 아쉽다.
처음 집을 계약하고 신혼집이라고 도배를 하고 청소하러 갔던 초 봄의 어느 늦은 밤,
밖은 캄캄하고 집 안은 가구 하나 없이 덩그라니 휑한 가운데 내가 과연 결혼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 두려워
방 닦다 말고 주저앉아서 엉엉 운 적도 있었는데.
살다보니, 도리와 함께하는 즐거운 추억들이 조금씩 조금씩 쌓여가면서 어느 새 이 집에 대한 애정이 많이 들었다.
나중에 이 곳보다 여건이 더 좋은 곳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 (지금 집값/전세값 생각하면 ....)
아파트 한 채만큼 커다란 나무 전체가 가을빛으로 물들어 시원한 바람소리를 내는 풍경을 가진 집은,
또 만나기는 어렵겠지.
먼 훗날, 이 풍경이 그리워질까봐 덜컹거리는 방충망을 열고서 오늘의 풍경을 소리와 함께 동영상으로 담아보았다.
창 밖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넋놓고 하염없이 보게되는 그런 집에 살았었다고 기억해야지.
여름은 짧았던 것 같은데, 올해 가을은 끝날 듯 끝나지 않고 여전히 가을 한 가운데 인것 같은 느낌이다.
바쁘다가도 여유롭고, 여유롭다가도 바쁜 10월의 마지막 주말을 보내고서
나 그리고 친구들의 SNS 계정을 훑어보다가 저마다가 생각하는 행복의 모습이 이렇게 드러나는구나. 생각했다.
누군가는 맛있는 음식 사진을, 누군가는 취미활동 사진을, 누군가는 가족사진을, 누군가는 쇼핑 사진을 올리는 가운데
내가 남긴 것은 대부분 풍경사진, 하늘 특히 노을 사진, 그리고 그 속의 나와 너와 우리의 사진들.
아침부터 밤까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비슷할텐데
사람마다 각별히 고르고 올린 일상의 모습은 이렇게 제각각인 것이다.
그러게.
요즘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아름다운 날에, 노력과 정성을 들여서 좋은 사람들과 좋은 순간의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
그것이 어떤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더라도, 그저 평범한 일상 속의 한두 시간일지라도.
조금 더 어릴 적엔, 행복하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에 씁쓸해 했었는데
이제는 내가 노력해서 행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삶에 대해 아주 조금, 겸손해진 것 같다.
그렇게, 행복하기 위해 맑고 청명한 2020년의 가을 날에,
단풍색이 발갛게 물들어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 행복을 찾아 다닌 나의 기록들.
어쩐지 근황을 글로 남기기 선뜻 어려운 요즘.
슬픔이 내 글의 원동력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혼자있는 시간과 공간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조심스러워서일까?
이상하리만큼 그 어떤 감정적인, 감상적인 마음의 물결이 일지 않는 서른 네살의 나날들.
오랜 기간에 걸쳐 나를 괴롭혔던 불면증도 사라지고 말그대로 '평화의 시대' 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물론 현실적인 고민들과 신경쓰이는 것들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평화롭고 평온하지만, 글로 남기고 싶은 그 어떤 소재도 떠오르지 않아서 조금 답답하달까.
지난 토요일, 청명한 가을 날 - 코로나19로 외식 한 번 쉽게 하지 못하셨던 엄마아빠를 위해서
온 가족(엄마, 아빠, 동생, 나, 그리고 신랑!)이 청평으로 가을 소풍을 다녀왔다.
봄에도, 여름에도 한 번씩 계획했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계속 취소하다가 가을이 되어서야.
그래도 내 경험상 이 곳은 가을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기에 날씨만 맑다면 모두가 좋아할 것임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아무래도 날씨좋은 가을날이라 청평까지 가는 길이 많이 막힐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또 결혼하고 나서 (이걸 글로 쓰면 왜이렇게 어색한지 모르겠다...) 남편(이것도 말로 하면 괜찮은데 쓰면 어색함.....)까지
집을 벗어나 야외에서 모이는게 처음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평소보다 더 어색하지 않을런지,
모임 주최자인 나는 전날 밤 마음이 콩닥콩닥.
밀릴까봐 너무 걱정해서 아침 7시반에 서울에서 출발한 탓에(;;) 양평 스타벅스에 들렀다가 안개 자욱한 청평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탁구장에 마음 설렌 아빠를 위해 한 시간 정도 탁구를 치고 나왔더니
안개는 어느 새 사라져버리고 우리 모두가 기대했던 맑고 청명한 가을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점심을 먹기 전에 가볍게 청평호를 산책했다.
드디어 점심시간이 되어 캠핑장으로 향했다.
어느 늦은 가을 날, 회사 사람들과 이 곳에서 야외 bbq 파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풍경과 정취, 그리고 그 날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언젠가 부모님 모시고 가을날에 꼭 한 번 와바야지 했었다.
그 날만큼 단풍이 완연하진 않았지만, 적당히 단풍이 든 나무들과 푸릇한 나무들이 섞여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항상 카메라에 다 담기지 않는 이 풍경의 아름다움이 아쉬울 뿐.
그릴에 번개탄과 숯을 올리고 불을 붙였다.
다들 캠핑장비는 처음이라 불을 붙이는 건 쉽지 않았지만 숯을 깨부시고 부채질을 하며 열심히 불을 피웠다.
나랑 엄마는 준비된 밑반찬들을 차리고 동생과 도리(남편)는 그릴에 열심히 고기와 새우와 소세지를 구웠다.
두 장정이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열심히 고기를 굽는데 뭐랄까, 집에 아들(?) 둘이 있어서 든든하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아빠도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
숯불향 가득한 고기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후식으로는 집에서부터 챙겨온 드롱기 포트에 물을 끓여 카누와 함께 양평 스타벅스에서 사온 케이크를 꺼냈다.
그늘 아래 있어 날이 좀 쌀쌀하기는 했지만, 따뜻한 커피가 든 종이컵으로 손을 녹이면서
동생의 파란만장했던 대학입시후기와 학부생활 얘기를 들으며 다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들 저녁엔 약속도 있고 또 늦게 출발하면 서울 가는 길이 막히기 때문에 귀가를 채비하던 때,
삼각대와 카메라를 꺼냈다.
언젠가부터 졸업식, 결혼식, 같은 행사가 아니면 가족사진을 찍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엄마는 나이가 들어서 이제 사진에 예쁘게 나오지 않는다고 사진 찍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기도 했지만
나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이젠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 그 순간의 기록들을 많이 그리고 오래오래 남겨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부터 사진을 위해 항상 예쁘고 젊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뒤돌아보면 오늘의 우리가 가장 젊었고, 소중한 추억을 만든 행복한 오늘이 가장 예쁜 것이었다.
언젠가 이 날을 되돌아보면서 참 좋은 날이었다고 기억할 수 있는 사진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감사하게도 날씨도 좋았고, 풍경은 아름다웠으며, 음식도 맛있었고, 분위기도 화기애애하고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 날의 사진엔, 그 모든 기억들이 다 아름답게 스며있을 것이다.
아빠는, 정말 너무 오랜만에 코로나를 생각하지 않았던 시간이라고 하셨다.
코로나가 터져서 외부 출입을 거의 삼가고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도 거의 없는 터라 아빠가 많이 힘들어하셨는데
이렇게 아주 잠깐이나마 생기가 넘치는 시간을 선물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돌아오는 길은 올 때의 2배 정도 걸렸다.
돌아와서 가족 단톡방에 찍은 사진을 올렸는데,
아빠가 오래만에 바람도 쐬고 탁구도 치고 고기도 구워먹고,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멋진 하루가 되었다고.
또 도리(남편)과 오손도손 단란한 모습도 보기 좋았다고 답을 하셨다.
(도리(남편)이랑 오손도손 단란했던 특별한 기억이 없는데 ... ㅎㅎ)
그런 아빠의 카톡을 받으니, 이제 결혼하고 내가 꾸린 가정에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는게
부모님이 바라고 또 기대하는 모습이시겠구나..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초새벽부터 집에 돌아오기까지, 주말 이틀 중에 하루를 온전히 내어주고
장인어른하고 열심히 탁구도 치고, 처남이랑 열심히 고기도 굽고, 와이프에게 새우도 까주고,
돌아오는 길엔 긴 운전도 묵묵히 해준 도리에게 고마웠다.
나로 인해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였지만 그래도 아직은 많이 어색하고 낯선 부분이 있을텐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 많이 노력해 준 우리 도리. (이 포스팅은 못 보겠지만) 고마워 ♡
올 해 여름은
입사 이래로 해외여행 없는 첫 여름이었고
역대 가장 긴 장마로 내내 비만 내리면서
여름다운 느낌도 없었는데
처서가 지나자마자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아침과 밤으로 찬 기운의 바람이 분다.
이렇게 2020년 여름이 끝나는구나.
유난히도 맑고 청량했던 어제,
정말 매일이 이렇기만 하면 소원이 없을 것만 같던 날씨.
자전거를 타고 잠수교를 가로질러 강변북로 아래의 한강공원까지 달려갔다왔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나 봤을 법한 분홍색 노을이 물들여가는 서울의 풍경을 보니
노을때문인가, 평소와 다른 곳에서 보아서인가-
이 곳에서 보는 서울의 풍경도 참 아름답구나.
항상 차를 타고 다녀서 비슷한 속도로 비슷한 풍경을 보고 다녔는데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 한 바퀴 나아가며 보는 세상은
차를 타고 보는 세상과 또 다르다.
새삼 서울이 이렇게 커다란 도시였구나,
(고작 잠수교 하나만 건넜을 뿐이지만) 강북의 자전거도로는 이런 풍경과 이런 느낌이구나.
새삼 강남과 강북이 내 마음 속에서 또렷하게 나뉘어져 다가온다.
차로 다니면 거기서 거기인 땅일 뿐인데
내 발로 가려니 강북은 내 세계와는 또 다른 세상인 것만 같다.
나와는 다른 삶의 양식을 가진 사람들이 (비슷하지만) 지금 나와는 또 다른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내며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다.
같은 공간에서 느끼는 낯설고 또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 생경한 느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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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새, 7월 하고도 중순.
장마가 온다 온다 하면서 미뤄지는 7월의 중순에 3일의 연차휴가를 냈다.
코로나 사태가 없었더라면, 지금 3일의 연차휴가를 쓰는 게 아니라
곧 다가올 2주간의 여름휴가를 위해서 사무실에서 열심히 일 하고 있었을텐데,
올해는 아무래도 가망이 없는 것 같다.
2주의 휴가(10일의 연차)중에서 1주일(5일)은 9월 초로 남겨 두고
3일만 앞당겨 쓴 여름 휴가.
결혼생활에 적응하면서 오는 정신적, 육체적 피로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한동안 일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은 느낌이 간절했다.
같은 회사에서 무려 8년 차, 만 7년을 일하고 있었고
맡은 업무가 프로젝트성 업무(시작과 끝이 있는 업무)가 아니다 보니,
끊임없이 과거에 자문했던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 발목을 잡는 듯,
일의 연속성의 측면에서 과거 검토자에게 올무를 씌우듯 돌아오는 일에
때로는 살짝 구역질이 났던 것도 같다.
쉴 때가 되긴 되었다.
- ㅇ -
그렇게 맞이한 7월 중순의 짧은 여름 휴가.
그런데, 여름에 여행을 가지 않고 휴가를 보내는 것은 입사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라
계획도 없이 덜컥 맞은 소중한 나의 재충전 시간에
서울에서 도대체 무얼 해야 만족스러울지
방안에서 정처 없이 서성이다가 (그 중에 하루의 반나절 씩은 밀린 집안일을 했다.)
찌는 무더위, 대중교통의 불편함을 뚫고 새로운 곳엘 다녀왔다.
성수동만큼 아주 새롭진 않았지만,
이 아래는 3일 간의 나의 재충전의 일기이자, 행복했던 순간에 대한 나만의 작은 사진전이다.
안국역 1번 출구에서부터 10여분 간 걸어 올라 가는 작은 골목길에서 본 풍경들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로 들어왔다.
사실 디자인 서적을 읽으러 온 것은 아니고,
북촌에 있다길래 - 그리고 공간이 주는 감각적인 느낌이 좋을 것 같아서.
디자인 라이브러리는 디귿(ㄷ)자, 혹은 미음(ㅁ)자 형태로 가운데 중정을 두고 지어져있었다.
실제 사용 공간은 탁 트인 개방형 공간이 아니라 구석구석 각이 져 있어서
얼핏 보기에는 크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미로같이 숨겨진 구석들이 많아서 눈에 보이는 것 보다 큰 것도 같다.
1층과 2층이 오픈되어 있었는데, 2층에는 책 읽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촬영은 되도록 자제했다.
가지고 온 책이 있다면 1층에서만 읽을 수가 있었다.
1층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의자를 전시하고 있었는데 마음에 드는 의자에 앉아서 편하게 독서를 할 수 있다.
라이브러리답게,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는 하지만 최대한 조심스럽게)
사람들은 말소리를 꺼내지 않았고 이 공간에 어울릴 법한 음악들이 플레이 되고 있었다.
나는 미술관 같이 디스플레이 된 세련되고 아름다운 공간에 앉아서
집에서부터 봇집지듯 지고 온 책을 꺼내어 읽었다.
음악 소리는 귀에 들려오지만 마음은 고요한 이 느낌.
새로운 공간, 새로운 배경, 새로운 음향의 조화가 선물하는 경험과 감각.
똑같은 생활반경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새로운 느낌.
딱히 디자인을 위한 연구를 하러 온 것은 아니지만,
한 번 와보기를 잘 했다고 생각하면서,
앞으로도 불편함에 개의치 말고 새로운 곳을 찾아다니자 생각하면서
아쉽지만 이제 다시 집에 간다.
이번에는, 올라올 때의 길 말고 덕성여고 건물의 반대편 너머의 길로 내려가 본다.
어짜피 길은 다 통하게 되어 있으니까.
이 골목은 또 어떤 풍경일까 기대하면서.
눈 앞에 펼쳐진 낮 시간의 아름다운 풍경을 핸드폰 카메라에 이렇게 저렇게 잘라 담으면서,
참 행복했다.
사진을 찍고 싶게 만드는 피사체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 요즘이기에.
내 마음이 동해서 눈 앞의 풍경을 나만의 사각 프레임에 가두어두고 또 그 결과물에 뿌듯하다.
- ㅇ -
여섯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는데도, 날은 여전히 밝고 또 맑다.
낮이 이렇게 긴- 긴 - - 시간이었구나.
사무실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낮이라는 시간이 주는 여유와 포근함.
어린아이이던 시절에 느꼈던 그런 느낌.
놀다가 놀다가 엄마가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불렀는데도 아직 해가 지지 않던 그 느낌.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다시 어린아이 이고 싶다.
급격한 생활의 변화(결혼과 독립!)으로 요즘은 글을 쓸 시간도, 글을 쓸 마음의 여유도 충분치 않고
무엇보다 글쓰기의 원동력인 나만의 감상적 영역이 도대체 채워지지가 않는다.
이건 하루하루 일하고 먹고 청소하고 자기 바빠서 인 것 같다.
그야말로 생활형 모드가 풀 가동되고 있어 감상적 영역에 새로운 감성에 노출되고 젖어있을 여유가 없다 해야하나.
하여 토요일에 이어, 일요일에도 성수동 나들이를 다녀왔다.
일요일의 이른 오후 내내 집 청소를 하고, 운전면허증 사진을 찍다보니 주말에도 일만 한 느낌.
이대로는 일요일을 보내는게 억울해서 데이트 하는 느낌으로 예쁘게 원피스도 입고 렌즈도 꼈다. 오랜만에.
서울은 하나의 도시이지만 각 동네별로 특유의 분위기들이 있다.
근 2년 가까이는 강남/역삼 일대와 여의도 일대만 오고갔는데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높고 커다란 빌딩 숲, 주차에 대한 편의, 건물 내부에 칸을 나눠 만들어진 편리함과 익숙함이 보장된 프랜차이즈 가게들.
편리하고 세련되었지만 전달되어 오는 감성이란게 없다.
성수동은, 서울숲까지는 와본 적이 있어도 카페거리까지 깊숙이 들어와 본적은 처음인데
아, 뭐랄까.
가게 하나 하나 건물 외벽의 소재, 창과 문의 모양, 간판의 종류 저마다의 개성이 눈길을 붙잡고
이 가게는 어떤 가게지, 저 가게는 어떤 가게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더라.
5~6년 전의 연희동/연남동의 느낌이 나면서도 조금 더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이랄까.
게다가 아직 그렇게 무덥지 않은 여름 저녁,
테라스와 통창을 개방한 가게들이 많아서 더욱 자유분방하고 활기찬 분위기까지.
한참의 웨이팅을 기다려 저녁을 먹고 나왔는데도, 여름의 낮은 길었다.
해는 졌지만 하늘은 푸르른 기운만 감돌고 낮에 보았던 가게들은 하나 둘 씩 불을 켰다.
조명이 더해지니 감성충만한 분위기가 가득 차는 이 곳.
낮에는 카페로 복작거렸던 어느 카페에서는 소규모 공연이 진행 중이라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이제 마감하고 뒷 정리를 하는 베이커리 근처에서는 고소한 빵 구운 냄새의 여운이 가게 앞을 감싼다.
무더위와 장마가 시작되기 전, 아직은 선선한 바람이 살곁을 스치는 여름 밤.
눈과, 귀와, 코와, 살결 모두 즐거운 이 거리.
분명 낯선 동네이지만 어딘가 익숙하고 마음이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낯선 동네에서 알게 모르게 20대 시절의 향수가 느껴지는 듯 했다.
15년 전, 대학생 시절에 홍대 깊숙한 곳 골목골목을 걸어다니며 받았던 그 느낌.
2020년을 살고 있지만 문득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살짝 들었고, 그리고 그 기분이 좋았다.
기분이 좋았던 건, 성수동에서 그 시절의 분위기를 느껴서가 아니라,
그때 그 시절의 호기심이 충만하고 감각이 예민하던 나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내가 가장 나답다고 생각했던 나.
지금은 어쩐지 사라져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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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회사분 따님의 결혼식에 갔다가 픽업하러 온 남편(!)을 만나 성수동에 들렀다.
목적지는 아쿠아 델 엘바(Aqua dell Elba), 이유는 디퓨저를 사러. :)
코가 예민하기도 하고 원래 향수도 디퓨저도 큰 관심이 없는 나인데
작년 여름, 이탈리아 토스카나를 여행할 때 가장 인상깊었던 숙소에서 아쿠아 델 엘바 디퓨저를 처음 보았다.
토스카나도 좋았고, 숙소도 좋았고, 디퓨저 향도 좋았고, 또 토스카나 브랜드여서 사오고 싶었는데
한참 여행 중이라 짐이 되는게 걱정되기도 했고,
(프로포즈 받은지 얼마 안 되었던 때라) 결혼하면 살게 될 내 공간에 두고 싶은 로망(?)도 있어서
이탈리아에서의 구매는 잠시 미루었다가 드디어 때가 되어 서울숲에 있는 아쿠아 델 엘바 스토어에 들르게 된 것이다.
아쿠아 델 엘바의 시그니처 향은 마레(Mare)이고, 숙소에서도 마레(Mare)향을 맡았던 터라, (여름이기도 하고) 마레(Mare)를 살까 하다가
여러 가지 향을 시향해보고 조금 더 포근한 느낌의 몬테 카파네(Monte Capanne)를 골랐다.
저마다 여행을 추억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어렸을 적엔 그것이 주로 사진, 마그넷, 기념품 컵 같은 것이었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여행하면서 만나는 특별한 (나만의 여행의 추억이 깃든) 물건 -
단지 장식장에 세워두는 그런 것 말고 일상생활 속에서 쓸 수 있는 물건을 찾게 된다.
그것도 여행을 기념하기 위해 억지로 찾는 것 대신, 여행 속에서 우연히.
호스텔에서 수건을 제공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샀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의 빨간 타올,
우산이 없어 급하게 샀던 캐나다 밴쿠버에서의 분홍색 3단 우산,
우연히 걷다가 들어간 가게에서 샀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주황색 지갑.
기념품과 달리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이기에 쓰다보면 점점 낡고 망가져가지만
일상생활 속에 스며든 물건들은,
나의 삶 속에서 문득문득 그 때의 여행을 불쑥 떠오르게 하는 가장 소중한 추억환기제랄까.
잊은 듯 살아갔지만 그 물건을 집을 때마다 여행했던 순간의 추억이 떠오르고,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그 기억에 미소짓게 되는 그 특별한 느낌이 좋다.
비록 이탈리아에서 이 디퓨저를 사오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한국에서 구할 수 있었고
나의 소중한 보금자리에서 매일 비슷한 일상을 살아가다가도
디퓨저 병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에는 2019년의 이탈리아 여행을 떠올리고 흐뭇해하겠지. :)
이제 디퓨저 뚜껑을 열고 스틱을 꽂아놓으며 지난 여름 이탈리아 여행을 떠올려본다.
이탈리아 북부에서부터 시작해서 돌로미티 산맥을 돌고 토스카나 지방을 거쳐 로마까지 내려갔던 2주간의 여행.
이번에 코로나 사태로 유럽에서 이탈리아가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다는 소식에 마음이 많이 아팠다.
하룻 밤 짧게 머물렀지만 기대보다도 훨씬 더 아름답고 무엇보다 진심으로 평화로워서
다음에 다시 오면 일주일은 머물러야지 마음먹었던 토스카나.
아름다웠던 풍경사진을 하나씩 꺼내보면서 너무 멀지 않은 때에 다시 가볼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
올해는 작년에 못 다 쓴 여행기나 써야겠다. 그럴 여유가 많지 않겠지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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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사라졌다.
(물론 여행말고도 많은 것이 바뀌었고 전세계가 질병으로 고통받는 것은 별론으로 한다)
비행기가 멈추고 국경이 닫히고 비자가 없으면 입국할 수 없는,
자유로운 여행이 사라진 시대.
이런 날들이 올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바로 6개월 전만 해도 하루가 멀다하고 항공사들이 새로운 노선을 광고하고
수많은 방송프로그램들이 해외여행 소개도 모자라 해외에서 요리하고 장사하고 노래부르고 숙소를 차리고
SNS에는 세계 방방곡곡을 여행한 사진들이 흘러 넘쳐났는데.
매년 이맘때면 곧 다가올 여름휴가를 생각하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악착같이 회사생활을 버텼는데
이번에는 여름여행은 커녕 인생에 한 번 뿐인 신혼여행마저 사라져버린 것이 2020년, 현실이네.
코로나가 없었다면 3월엔 스페인에, 9월엔 뉴욕에 가는 것이 올해의 여행계획이었고
코로나가 한창이었던 초봄만 해도 여름만 지나면 코로나가 끝나서 해외여행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기대했었지만,
코로나가 우리의 삶을 잠식한지 어느새 5개월이 넘어가는데
끝이 보이기는 커녕 이제 정말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 같고
코로나가 바꾼 삶의 모습은 더 이상 임시적인 것이 아니라 깊이 고착화되는 것 같다. 소위 - 뉴노말.
이런 시대. 상상도 못했던 2020년.
요즘엔 잠들기 전에 가만히 눈을 감고 상상여행을 한다.
여행했던 곳들과 그 날의 날씨와 기분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그때의 느낌을 상상한다.
일상생황 속에서도 여행하던 순간들을 애써 끄집어내어본다.
이 노을의 빛깔, 이 바람의 간지럼, 이 습도의 청량함.
순간 순간 기억과 살결에 새겨진 비슷한 지난 날들의 감각을 흔들어 깨워보며.
점점 기약이 없어지는 불과 반년 전의 삶.
과연 돌아갈 수 있을까.
얼마나 걸릴까.
모든 게 멈춘 덕분에 2020년의 하늘과 공기는 맑고 청량하기 그지 없다.
야속할만큼 좋은 날들이다.
여행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