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시 21분.

침대에 노트북을 들고 올라와 벽에 기대 앉았다. 

오늘은 창문을 열지 않았다.

저녁까지 비가 내린 후라 아주 조금, 쌀쌀하다. 



이 밤에 어울리는 노래는 무얼까. 

플레이리스트를 아무리 뒤져봐도 어제만큼 키보드를 두들기게 할 곡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500곡을 뒤지고 나서야 한 곡을 골랐다. 




가을이어서 그럴까,

10월이어서 그럴까,

스물일곱이어서 그럴까,

아님 입사 3개월이 지나서 그럴까.

뭐 어쨌든.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던 때가 지나고, 마음 속에 생각의 나무가 자라는 시기가 왔다. 

딱히 슬럼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의욕이 있는 것도 아닌

조금 많이 무기력하고 허무하고 내 인생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때. 




며칠 전, 정말 갑자기 머릿속에 번쩍- 하고 든 생각은

어느 순간부터, 더 정확히는 취직한 이후로 인생의 롤모델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 인생에 원래 어떤 특정한 롤모델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길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따라갈 사람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나의 인생의 고민을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나아갈 방향을 가리켜줄 수 있는 사람을 잃어버린 것이다.



(모든 사람의 인생이 같을 순 없지만 적어도 내 기준에서)

어렸을 적 나를 포함한 우리들의 고민은 모두 같았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것, 좋은 성적을 받는 것.

나의 선배들도 이 고민을 했고, 나와 내 친구들도 이 고민을 했고, 나의 후배들도 이 고민을 했다.

내 앞에는 수많은 선배들이 각자 자기만의 방법으로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주었고

나는 굳이 그 중에 누군가를 롤모델로 삼은 적은 없지만

그러려니 그들처럼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에 가고 싶어했다.

우리들은 그것을 고민하고, 상담받고, 조언받고 오로지 그것만으 좇았다.

좋은 성적을 받아 좋은 대학에 간 사람. 

특정할 수 없지만 그것을 이룬 모든 사람들이 앞으로 내가 갈 길을 먼저 걸어간 롤모델들이었다.



모두가 똑같은 길을 달리던 10대가 끝나고

우리는 조금 더 넓은 세상에 던져졌다.

다양한 환경, 다양한 나이, 다양한 경험의 사람들이 뒤섞인 작은 사회였지만

그곳은 정말 "작은" 사회였을뿐, 여전히 커다란 "학교"였다. 약간의 업그레이드가 된?

여전히 우리는 학생들이었고, 커리큘럼이 있었다. 

졸업장을 받고 싶으면 어쨌든 우리는 학교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커리큘럼을 따라가야했고, 

나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어쨌든 그 커리큘럼을 먼저 밟아간 선배들을 보며 나의 커리큘럼을 짰다.

고등학교때 보다 조금 더 업그레이드된 것이 있다면

이제는 오직 시험성적뿐만 아니라 예비 사회인이 되기 위하여 사회가 정해준 여러가지 스펙도 갖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열심히 토익성적을 올리고, 공모전에 나가고, 방학이면 회사에 나가 인턴쉽을 했다.

나는 마치 내가 그것을 주체적으로 하는것처럼 굴었지만

지나고 생각해보니 세상이 정해주는 커리큘럼을 따라갔고, 그길을 먼저 걸은 선배들을 보고 배운 것에 불과했다.

그래도 그 마저도 내 시대를 사는 대학생들이 모두 고민하는 것들이었다.

우리는 세상의 롤모델들이 정해준 것들을, 디테일을 조금 다를지언정 같이 고민하고 공감했다. 





그리고, 나는 한 단계의 학교를 지나 

스물일곱에서야 사회로 겨우겨우 나오게 되었다.

내가 느낀 사회는, 

망망대해 같은 곳이었다. 태평양 같기도 하고 대서양 같기도 했다. 

그곳엔 커리큘럼이 없었다.

모두 각자가 알아서 자기들만의 길을 찾아 걸어갔다. 

똑같은 회사원이지만 서로 하는 팀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르고, 추구하는 가치가 달랐고-

똑같은 변호사이지만 역시 하는 일이 다르고 원하는 삶의 방향이 달랐다. 

모두가 제각각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내가 따라가야할 삶이 어떤 삶인지 방향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똑같은 변호사지만 남자 변호사와 여자변호사는 다르다.

똑같은 여자변호사지만 로펌 변호사와 사내변호사는 다르다.

똑같은 여자사내변호사지만 법무팀과 법제팀은 다르다.

똑같은 여자사내변호사로 법제팀에서 일하지만 그녀의 목표와 나의 목표는 다르다. 



마치 우리가 살아온 1년, 1년이 모두 콤비네이션 조합 같았다. 

1년에 오로지 2가지 선택만 할 수 있다고 해도, 나는 2의 27승의 경우의 수 중에 단 하나의 인생을 선택해온 것이다.

지금까지 나와 비슷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을 찾는 것도, 

앞으로 내가 나아갈 인생과 비슷한 인생을 살아갈 사람을 찾는 것도

불가능해보였다. 

꼭 우리가 비슷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을 따르고 그에게서 조언을 구할 필요는 없지만,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수록

내가 살아온 나의 성장환경과, 지금 내가 처해진 상황이라는 조건 때문에 

그렇게 살아오지 않은 다른 누군과 전혀 다른 정답을 내릴 수 있다는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에겐 - 내 인생에 맞는 조언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인생의 경험들과 지금 내가 처한 상황, 

내 커리어로 꾸려갈 수 있는 수십가지의 나의 미래들을 모두 이해하고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내게 딱 맞는 조언과 진심어린 충고를 해줄 수 있는 사람. 

나에겐 그런 롤모델이 필요한 순간이 왔지만

나는 그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못찾는게 아니라,

아마 이 세상에 영원히 그런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있을 수가 없다. 

내가 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는 오로지 내가 정할 문제였다.

아마 인생의 중요한 순간순간마다 내가 내 인생을 어떻게 결정할지 

케이스바이케이스로 참고할 인생의 선배들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찾는 것도 온전히 내 노력에 달린 문제겠지.



나는 이제서야 그리고, 비로소 커다란 사회란 곳에 나 홀로 던져졌음을 깨닫는다.

늦은 것인지 이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가장 적당한 시기였을 거라 믿기로 했다. 

아마 나는 이 커리큘럼도, 정답지도, 완벽한 롤모델도 없는 세상에서

이제부터는 내가 나의 롤모델이 되어야할 것이다.


나의 경험, 나의 상황들을 오롯이 공감해줄 사람을 찾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마음 한켠이 답답한 일이고 조금 슬픈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상의 망망대해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동동 떠있을 때

누굴 따라가야 할지, 어느 빛을 보고 가야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굴리고 있을 때

세상에 원래 내게 꼭 맞는 롤모델은 없으니까

내 인생은 내가 롤모델이 되어가는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잠잠히 가라앉았다.




가끔은,

너무 당연한 것을

너무 새롭게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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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oney,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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