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changed melody.

■ 삶/II. 삶 2016. 10. 20. 10:14

 

"Oh my love.
My darling.

Time goes by so slowly.
Time can do so much."


-


" 정리를 하다보면 갑자기 예전에 사긴 샀는데 샀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물건,
과거의 남자친구에게 선물받은 물건, 일기장, 스크랩북, 편지 따위를 발견하게 되고,
어느 순간 나는 정리 같은 건 잊은 채 물건더미 속에 파묻혀서 추억 속에 빠지게 되고,
옛 남자친구와의 추억을 곱씹게 되고, 그러다보면 인생이 허무해지고,
내가 헛살았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다 보면 하루가 다 가고,
결국 지친 채로 산더미 같은 쓰레기들을 서랍 속에 쑤셔 넣고는 닫아버리게 된다.
이런 나도 15년쯤 전에 첫사랑이 군대에서 보낸 편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다.
그래도 못 버리겠다.
불에 태우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차라리 그 남자에게 확 돌려줘버릴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 남자 입장에서는 황당한 일이겠지만. "

 

- 온전히 나답게 / 한수희


-


지난 월요일. 상영관도 2개 밖에 남지 않은 영화 《다가오는 것들》을 퇴근 후 홀로 보았다.
영화를 혼자 보는 건 내게는 매끼 밥먹는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고,
나는 특유의 과장 없이 덤덤한 프랑스 영화를 좋아하고,
관객과 평론가의 평가가 같이 좋은 영화인데다
그 날 따라 새벽에 운동을 해버려서 저녁에 운동을 해야하는 숙제도 없어서
나는 냉큼 월요일 저녁의 프랑스 영화관람을 내게 선물했다.

 


나는,
인위적인 사건으로 극적인 긴장감과 카타르시스로 관객을 매혹시키기보다는
기승전결이 아주 뚜렷하지 않지만 일련의 사건과 장면 속에 주인공들의 감정과 생각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영화를 좋아한다.
(물론 기승전결이 뚜렷하나 과하지않은 영화도 좋아한다.)

 


《다가오는 것들》이 바로 그런 영화였는데
기대를 너무 많이 했는지 아니면
내 개인적인 문제로 집중력이 흐트러져서였는지
매끄럽지 않은, 뚝뚝 끊어지는 듯한 연결에 그 순간엔 다소 실망하고 몸을 뒤틀어가며 보았지만,
이상하게 영화를 보고 하루 이틀이 지날 수록 마지막 장면에 흐르던 노래와 함께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의 여운이 잔잔한 파도처럼 마음에 밀려온다.
영화의 장면들이 사진처럼 한 장, 한 장 마음에 메아리쳐 뇌리에 박힌다.

-

정신없는 출근길, 북적이고 비좁은 지하철안에서
그 마지막 장면에 나즈막히 깔리던 Unchanged melody를 들으며
 책을 겨우 반쯤 편 채로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내려가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영화 주인공 남편 하인츠의 마음이 변했지만
나탈리는 여전히 살아가고 멜로디는 변하지 않는다.
 나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부대끼는 것이 일상인 사회인이 되었고,
11년 전 첫사랑에 대한 내 마음과 그의 마음 역시 변했지만
그 날의 편지에 쓰여진 꼬부랑거리는 글자들은 변하지 않았다.
나도 세상도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순간 순간인것인가.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에서 나는 변하지 않는 멜로디를 듣고 있다.

 


때론 명백한 비극보다, 처절한 울부짖음보다
괴로운 상황에서도 담담하고 처연한 태도가 마음 깊숙한 곳을 울리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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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oney,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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