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많은 유명한 도시들에는 주로 '강'이 있다. 서울의 한강, 런던의 템즈강, 파리의 세느강, 리스본의 테주강..
어짜피 물은 물일진데, 이상하게도 강이 있는 곳과 바다가 있는 곳은 그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도시의 느낌도, 내 느낌도.
강은 꿈꾸게 하지 않지만, 바다는 꿈꾸게 하고 상상하게 하고 그리워하게 하는 힘을 가졌다. 적어도 내게는.
어쩌면 바다가 있는 곳을 좋아하게 된 건, 순전히 밴쿠버 때문일까?
막상 내가 밴쿠버에 살땐 가을을 지나 비가 줄줄 오는 겨울과 갓 날씨가 풀릴것 같은 봄이었기 때문에
밴쿠버의 비치에서 따땃한 햇살에 몸을 뒤척뒤척하며 물놀이 하던 그런 기억은 없었다.
오히려 그 으슬으슬하고 비가 오는 겨울 밤새 불면증에 침대에서 뒤척뒤척하다
비너리가 문을 열기 무섭게 런던포크에 쿠키하나를 싸들고는 질척질척하는 렉비치에서
정말 아무 생각도 없이- 울컥울컥 밀려오는 바닷물을 구경하던 것이 내 인상에 깊게 남아있는데 말이다.
그렇게 바다에서 물장구친 기억이나 우울의 청승을 떨었던 인상깊은 기억들을 슥슥 지워봐도
내가 살고 있는 곳, 그리고 아주 가까운 곳에 매일같이 탁 트인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냥 산으로 둘러쌓인, 혹은 건물로 둘러쌓인 도시에서 사는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경험이었다.
조깅을 하다가도,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자전거를 탈 때도 파란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
그런 이유로, 도심가 바로 옆에 바다를 끼고 있다는 이유도 바르셀로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된 것 같다.
처음 바르셀로나에 왔을 땐, 바닷가에 가 볼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민박집에서 만난 언니들이 바닷가에서 가서 태닝을 할꺼란 얘기를 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리고 원래 가려던 목적지를 잃고 방황하지만 않았더라도.
아무 예고 없이 마주쳤던 바르셀로네따 해변은, 즐거운 충격이었다.
바다가 있다는 것보다도 '지중해'라는 사실이 나를 흥분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그 바르셀로네따 해변에 다시 한 번 발길을 옮겼다.
문득 모래사장에 앉아서 바다를 보며 샌드위치를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샌드위치 가게는 찾지 못했지만
빵과 쿠키와 케잌과 피자를 파는 그런 가게를 발견했다. 분명히 손가락을 가르키며 주문을 했는데-
바보들, take away해준 상자를 열어보니 주문한 빵 하나도 빼먹고-(다행히)계산서에도 빼먹었다.
여름엔 에메랄드빛에 가까웠던 것 같은데, 겨울바다는 이렇게나 파란 파다였다.
우리의 소원대로 해변가에 앉아 가벼운 점심을 먹었다.
물에 발을 담그고 싶었지만, 패스......
하하 귀여운, 찐찡. 사진찍는데 갑자기 바닷물이 들이닥쳤다. 그야말로 스냅샷
{경인v한민 BCN} 이런건 꼭 해줘야 한다며.....저 멀리 보이는 건 W호텔.
해변가에 사람이 없어서 사진찍어줄 사람을 못만났다. 어느 건물 유리창에 비친 우리.
그래 찐찡. 세상을 다 가져라!
그땐 5월이었는데 태양이 어찌나 뜨겁던지, 선글라스를 끼고도 눈이 이글거리고 피부가 따끔따끔했는데
아무리 따뜻한 겨울이라고 해도 겨울은 겨울이 맞나보다. 파란하늘과 파란 바닷물 때문에 뭔가 상큼했던 기억으로만 남았다.
다시 고딕지구로 돌아가는데 뉴초콜렛폰을 광고하는 옥외광고를 보았다. 뭐라고 써놓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소녀시대가 모델은 아니다. 생각보다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광고여서 좀 실망스러웠지만-
아직도 타국에서 우리나라 회사제품들을 보면 반갑다.............아......날 RPST에서 떨어뜨린 LG...........미워하려 했는데..
바르셀로나는 참 매력적인 도시다. 색다른 가우디의 건물들이 관광객을 끌어들이지만-
바르셀로나에 발을 디디면 다들 책에서는 읽을 수 없었던 바르셀로나만의 매력에 푹 빠지곤 한다.
산도 있고 바다도 있고 가우디가 만들어 놓은 독특한 건물도 있고 시원시원한 도로사이로 중세풍의 건물이 있고
무엇보다도 나는 한번 길을 드면 여기가 어디쯤인지 알 수 없는 미로같은 고딕지구가 참 좋다.
골목골목을 걸으며 맘에 드는 아무 가게나 들어가 물건들을 구경하고, 셔터를 내린 가게는 셔터에 그려진 그래피티를 구경하고
길을 잃은 것 같지만 걷고 또 걷다보면 잠시 미로속에 빠졌다 나온 것처럼 바깥 세상으로 나오는.
이번에도 그런 미로같은 길찾기를 기대하고 고딕지구 안으로 들어갔는데 - 길을 잃어야 하는데 -
이상하게도 자꾸 똑같은 길로 똑같은 광장으로 되돌아 나오더라. 어떻게 가도 계속 되돌이만 하는데 공포영화 찍는 줄 알았다.
그러다 어느 츄로스 파는 가게로 들어갔다.
내가 제일 처음 스페인의 츄로스와 초코라떼를 먹었을 때, 엄청 실망했었다.
초코라떼는 마치 물탄것처럼 밍밍하고 츄로스는 설탕과 계피없이 조금 짭쪼롬하고 - 쫀득하기보단 조금 바삭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이번에는 두번째 먹는다고 원래 초코라떼는 이렇고 원래 츄로스는 이렇구나.....음미하면서 먹는다.
계산을 하고 일어서려는데, 도도하게 우리한테는 신경도 안쓰던 머리 희끗희끗한 주인 아저씨가
우리보고 어디에서 왔냐고 묻더니 갑자기 잘 코팅된 사진을 보여주신다.
빛바랜 흑백사진 속엔 바로 이 카페bar에 왠 잘생긴 소년이 활작 웃고 있었는데 - 그게 어렸을 적 자기라며 어깨를 으쓱하신다.
생김새를 보니 시원시원하게 생긴 이목구비가 딱 이 아저씨인데, 이 천진난만한 웃음은 세월따라 어디론가 사라지고
조금 쌀쌀맞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첫인상이 아저씨의 얼굴에 자리를 잡았다.
항상 이렇게 웃고 계신다면 훨씬 좋을텐데요.................
어딘지 까먹었지만...어쩌다보니 키위주스 홍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밤이 되서 그라나다로 가는 야간 열차를 타기 위해 (그 망할 놈의) Estacion Sants역에 짐을 싸들고 왔다.
시간이 한참 남아서 매표소의 좌석에 앉아 기차를 기다리는데 옆에 젊은 아빠,엄마 그리고 5살정도의 귀여운 아들의
세 가족이 앉아서는 장난을 치면서 놀고 있었다. 아이가 귀여워서 몇번 눈을 마주치고 까꿍 웃어주었는데
낯선 이방인이어도 자기 아이를 이뻐하는 걸 보고 그 부모님도 좋아한다.
뭐라고 말이라도 붙여보고 싶어서 스페인어 책을 뒤적뒤적 해서 '아들','귀엽다'는 단어를 용기내어 말했는데
표정을 보니 무슨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어서 낙심하려는 찰나, 애 엄마가 "beautiful?"이라고 반문한다.
..............여자한테만 beautiful을 쓴다고 생각했는데 어쨌든 뭐 그런 뜻아리치고 대충 고개를 끄덕였더니
"Guapo!!"라는 스페인어를 다시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Guapo!"라고 외쳐주었더니 "Mucho Guapo! (아주 잘생겼어!)" 라고
말하며 깔깔 웃는 애엄마의 센스. 그 뒤로 정말 손짓 발짓 해가며 단어로만 대화를 하는 엄청난 내공을 쌓았다.
대화는 대충...어디서 왔니? 한국에서 왔어. 어디로 가니? 그라나다로 갈꺼야. 바르셀로나는 구경했니? 응, 바르셀로나 아주 좋아
바르셀로나 어디어디 가봤니? 사그라다 파밀리아,까사밀라,바르셀로네따, 바리고딕 등등.
한참 대화에 재미를 붙이고 있는데 이제는 기차를 탈 시간이 왔다.
아주 잠깐 얘기했는데 왜이렇게 아쉽던지, 이 가족도 정말 진심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몸조심해서 여행하라고 몇번이나
잘가라며 인사를 해주었다. 같이 기념 사진이라도 찍어놓을 껄-
아들이 잘생겼단 말에 엄청 좋아하던 아이 엄마, 바르셀로나가 좋았다고 하니까 눈을 반짝이던 아이 아빠-
그리고 내 까꿍에 쑥쓰러워하면서도 좋아했던 고 구아포!
비록 그들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내 기억속엔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으로 오랫동안 남아있겠지.
내가 바르셀로나에 2번이나 가게될 줄 알았을까? 어쩌면 또 가게 되지도 않을까. 그러니까 Adios라고 인사하지 않을게.
Hasta la Vista, Barcel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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