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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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정신없는 세상 속 하나의 섬 같다.
학교를 다닐 땐 이곳만큼 다이나믹하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데가 어디있을까 했지만
바깥세상에 비하면 홀로 느리게 시간이 흐른 것만 같다 .
졸업하고나서 미디어관과 현대자동차경영관이 생겼고, 깡통이 사라진 거 말고는 크게 변한 게 없는 것 같았다.
번잡한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것처럼.
10년이 흐르는 사이에도 크게 변치 않은 것처럼.
주말의 한적한 이 캠퍼스가 마음을 고요케 한다. 어루어만진다.
마치 소란스러운 세상으로부터, 소란스러운 내 마음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는 것 처럼.
정대후문에서 민주광장, 중앙광장과 삼성관, 경영대와 중도를 거쳐 다람쥐길을 천천히 산책하며 이런 저런 추억들을 생각했다.
분명 이 건물 저 건물 뛰어다니며 수업을 듣고 축제준비도 하고 촬영도 하고 가장 바쁘고 활기차게 살았던 거 같은데
시간이 많이 지나 4년간의 일들이 한데 뭉치고 희미해져 어렴풋하기만 하다.
시간이 야속하기도, 허무하기도.
이 세상이 다 내것 같고,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인 것만 같은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변하고, 학교는 그대로인 가운데
왠지 나는 별 볼일 없어져버린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 원래 별 볼일 없었던 것이었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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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일 없는 나날들이지만, 그렇다고 딱히 또 마구 즐거운 나날들인 것도 아닌
그렇게 평온한 듯 무료한 듯 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삶인데
가끔은 혹은 종종 다 버리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 불쑥 불쑥 솟구쳐 오르기도 했다.
직장에서 받는 압박감, 집안의 장녀로서 느끼는 부담감, 사회에서 느껴지는 내 자신의 모습.
아무도 나를 대놓고 억압하고 고되게 구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하루하루를 헤쳐나가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마음 속을 짓누르는 무거운 마음들, 어두컴컴한 생각들 - 그런 것들과 싸우면서.
내 탓을 했다가 남 탓을 했다가 나이 탓도 했다가.
떠난다는 것은, 도망치는 것인지 해방되는 것인지 불분명했다.
도망친다면 도망쳐도 괜찮은건지 도망치는 것이 나쁜건지.
인생을 살아가는 나약한 소리는 아닌지, 아니면 이렇게 살고 싶으면 살아봐야 하는 건 아닌지.
나 말고는 정답을 줄 수 없는 질문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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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제일 싫은게 막연한 건데
스물아홉은 막연하기만 했다.
뒤집어 말하면 그래도 아직 자유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스무살에 가졌던 자유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내가 너무 겁내고 나 스스로를 너무 움츠러들게 하는건 아닌가도 싶었지만
명쾌한 플랜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막연함 앞에서 수그러드는것이 당연하기도 했다.
스물아홉. 꼬맹이 초2개와 키다리 초9개.
가볍고 명쾌하게 살고 싶은데,
내게는 고작 11개짜리 초가 한없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 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자꾸만 저 깊은 바다속으로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초가 3개로 줄어들면 다시 떠오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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