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먹고 집에 돌아오니 집은 텅 비어있고
내 방 옷장앞에 새 옷 두벌이 걸려있었다.
둘다 며칠 전에 엄마랑 쇼핑다니면서 입어보았던 옷이었는데
하나는 원피스였고, 하나는 베이지색 정장 자켓이었다.
원피스는 그렇다치고 베이지색 정장자켓을 보고는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그리고 엄마한테 문자를 보냈다.
<엄마, 왜이렇게 비싼거 사왔어>
보통 고급 여성정장은 얼마나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 브랜드 자켓하나면 다른데서는 투피스 정장을 세트 사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 날도 엄마가 이 브랜드 옷이 이쁘다면서 나한테 입혀놓고는 맘에 들어하시길래
설마 엄마가 덜컥 사줄까봐 뭐 비싼거 살필요 있냐고 넘어갔는데
엄마가 말도없이 덜컥 사와버렸다.
집에 돌아온 엄마는 내게 구구절절 변명(?)을 했다.
< 너 일나가면 이제 옷 보러 다닐 시간도 없잖아. 딱 맞는거 찾기도 어렵고.
그리고 괜찮은 정장 한 벌은 있는게 좋아.
너 지금 있는 건 면접용 검은 정장자켓밖에 없잖아.
결혼식 같은 때 일하는 친구들은 다 좋은 거 입고 올텐데 칙칙한 검은 정장입고 가지말고>
...
며칠 전에 엄마한테 결혼식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3주뒤면 같은 로스쿨에서 공부했던 한 커플이 결혼을 한다.
둘다 우리나라에서 내로라 하는 대형로펌에 다니고, 아마 결혼식에는 대형로펌 다니는 친구들이 많이 올 것 같다.
아직 취직을 못한 다른 친구가, 그 결혼식 가면 대형로펌들에 다니는 동기들이 다 올테고 괜히 가기 싫다고 하길래
나는 그런거에 기 안죽고 제일 이쁘게 입고 갈 거라고,
대형로펌 다니는 애들은 일하다가 결혼식 와서 다시 일하러 가겠지 뭐.
라고 대답했다는 얘기를
엄마한테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엄마도 <그래. 이쁘게 입고가>라고 했는데
아마 엄마는 대형로펌다니는 애들이 비싸고 이쁜 정장들 입고 올텐데
나는 그냥 원피스 입고 가게될까봐 마음이 쓰이셨던것 같다.
나는 비싼 정장같은거 하나도 부럽지 않은데,
내가 돈을 벌어도 이렇게 비싼 자켓은 아마 안샀을 거다.
엄마한테는 이만큼 비싼 정장 한벌 있을까?
내가 아빠돈으로 이런거 받아도 되는걸까?
엄마아빠는 할인하는거를 열심히 찾아사시면서 나랑 동생꺼는 항상 제일 좋은 걸 아낌없이 사다주셨다.
항상 그런식이었다.
공무원인 아빠 월급 하나로 4명가족이 먹고사는데
나는 한 번도 내가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배우고 싶은 건 넘치도록 배웠고, (물욕이 없는 편이긴 하지만) 갖고 싶은 것은 다 가질 수 있었다.
엄마가 알바할 시간에 차라리 공부해서 장학금을 타라고 해서 대학생때 알바도 과외도 안해봤다.
그리고 아빠 돈으로 힘들때마다 여행도 다녔다.
엄마 아빠가 아낀 돈으로 나는 분에 넘치게 풍족하게 컸다.
21살에 밴쿠버에 갈때도,
22살에 세계여행을 할 때도,
얼른 커서 돈벌어서 엄마아빠한테 다 갚아드려야지...라고 생각했는데
27살이 되도록 아빠돈으로 먹고, 놀고, 배우고 그러고 산다.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건 아니지만...
물건으로만 효도하는 건 아니지만
이제는 내가 갚을때도 됐는데,
나도 엄마아빠한테 해주고 싶은게 너무 많은데,
아직도 받고만 있어서 속이 상한다.
로스쿨에서 공부할때도, 엄마한테 나중에 좋은데 취직해서 좋은 핸드백 사주겠다고 했는데
좋은데 취직은 커녕 대졸때 붙었던 회사들 서류통과도 너무 어렵다.
엄마가 도자기에 그림그려달라고 부탁해서
이쁘게 그려주고 싶었는데
오늘 그것마저도 허탕쳐서 속상하다.
올해안에는 꼭 취직해서 당당하고 떳떳하게 취직선물도 드리고
엄마아빠한테 맛있는 식사도 대접하고 싶다.
때를 기다리는게 쉽지 않은 2013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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