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15일 토요일 오후 1시


벤쿠버 인터내셔널 공항,
샌프란시스코발 UA 1137이 이륙할 게이트 80번 앞.

"언니, 나.....보딩패스가 없어졌어!"
".......뭐?!!!!!!!!!!!!!"


비행기 이륙이 15분도 채 남지 않았는데
나의 3주간의 사고다발 겨울방학 배낭여행은
탑승권 분실과 함께 시작했다.

----------------------------------------------------------------------------------

여행 2개월 전,
추운 건 싫다는 단순한 이유로 남들이 다 가는 크리스마스에서의 뉴욕을 마다하고
나와 선희 언니는 덜컥 미국서부와 멕시코시티까지 가는 비행기표를 결제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무모한 도전'이 아니었나 싶다.
여행사도 가이드도 없었고, (사실 원하지 않았고)
같이 동행해줄 든든한 남성도 없었고, (이건 정말 없었고)
미국 서부여행의 필수인 차도, 면허증도 없었고, (
더더욱 계획도 없었다.
그냥 지도에 보이는대로
샌프란시스코-라스베가스-로스앤젤레스-멕시코시티 순서대로 비행기표를 끊었고
그 이후로는 시험이니 퀴즈니 과제니 어영부영하다가
덜컥 여행날이 다가와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여행 하루 전날인 14일까지 빡빡하게 기말고사를 치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시내에 나가서 환전을 하고, 그랜드캐년에 갈 그레이하운드 버스표를 사고,
마지막으로 앤디네 집에 들러 한국으로 돌아갈 에밀리에게 작별인사까지 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밤 11시쯤 집으로 기어들어와 그 때부터 짐싸기에 돌입했다.
짐을 싸다가 지치면 여행정보를 찾아보고, 피곤하면 또 짐싸고. 여행정보 찾고. 짐싸고.
그러다 보니 어느 새 여행 첫날의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쓰러질만큼 피곤했지만 어쨌든 비장한각오로
캐리어를 달달달 끌며 벤쿠버 국제 공항으로 향했다.
21일간의 여행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감히 상상도 못한 채.


-------------------------------------------------------------------------------------


"너가 어디어디 갔었지? 팀홀튼이랑 또 어디갔지? 빨리 되돌아가서 찾아보자"
선희언니가 다급하게 외쳤다.

내가 지금까지 있었던 곳을 다시 다 되돌아보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팀홀튼까지 뛰어가면 비행기가 우릴 놔두고 이륙할 태세였다.
눈 앞이 캄캄했다. 망했다.
 
-아직 여행 시작도 못했는데 여기서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내가 못가면 선희언니는 3주나 혼자 여행하게 되는거야?
무슨 낮짝으로 집에 돌아가지? 나 어떻게해?

그 때 갑자기 무슨 정신이 들었는지
지푸라기라도 잡아본다는 심정으로
검표하는 데스크에 달려가 책상을 내리치며 직원에게 말했다.

"I lost my boardingpass!!!"

- 뭐라고 대답할까? 이 원칙주의 나라에서 그냥 타라고 하지 않겠지?
표를 다시 끊어오라고 할까? 아님 어쩔수 없다고 할까?


"....."


피가 말렸다. 손에는 진땀이 흘렀다.
직원은 날 한번 치켜올려보더니


"What's your last name?"
"...p...p....park?"

여권검사 한 번 없이 그 자리에서 보딩패스를 바로 발권해줬다.
마치 별거 아니라는듯이.
원래 이런 거라는 듯이.


원래 그렇게도 재발권 해주는 건지
아니면 이례적으로 재발권을 해줬던 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팀홀튼까지 뛰어가는 수고 없이
나와 선희언니는 가슴쓸어내리며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그때 바로 발권받았다고 흥분해서 신나게 떠들며 비행기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탑승권 분실이 이제 시작되는 21일 간의 울고 웃는 여행의 전초전에 불과 하다는 것을,
그 때. 아주 조금 짐작하고 있었다. 아주 조금.



Posted by honey,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