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이사갈 집을 구해야 한다는 현실에 부딪혀 연말다운 마음의 여유도 없이 바쁘게 지내다가
집 계약을 마치고나서야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하루하루 사는 일에 미뤄두었던 문화생활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미술 작품 전시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검색해보던 찰나에
위 포스터에 실린 그림, 앙드레 브라질리에의 <장미빛 하늘로 향하는 요트 경기> 작품을 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주말이라 사람이 많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바로 챙겨 예술의 전당에 다녀왔다.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마침 도슨트 해설이 있어서 시간에 맞춰갔는데,
어림잡아도 한 7~80명이 다같이 50여분간 도슨트 해설을 함께 듣게 되었다.
앙드레 브라질리에라는 작가의 이름은 무척이나 생소했지만
그의 그림은 마치 오래 알아온 작가의 작품처럼 따뜻하고 편안했는데
도슨트의 해설에 따르면, 자신의 작품을 보고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고 편안하고 행복하길 바라는 작가의 신념이 있어서란다.
작가의 초창기 작품부터 최근작까지 120여점의 유화작품들이 주제에 따라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 작품들을 관람한 계절이 겨울이어서였을까?
작가가 가장 사랑하는 색이 파란색이어서 푸른 색 느낌의 작품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과 눈길을 사로 잡는 것은 분홍빛 하늘과 노란색 은행나무를 그린 풍경들이었다.
어떤 순간이 또렷이 떠오르는 건 아니지만,
나도 언젠가 주황빛이 아닌 분홍빛으로 물드는 노을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었던 순간이 있지 않았던가.
작가가 그린 분홍빛 노을이 담긴 작품들을 보며, 어떤 과거에 느꼈던 감동의 마음들을 끄집어 내보았다.
분홍빛 노을을 그린 작품들을 보면서, 2019년 야수파 전시에서 보았던 작품 중에 내가 제일 좋아했던 작품,
앙드레 드랭의 <채링 크로스 다리> 를 많이 떠올렸는데, 나중에 작가에 대한 설명을 보니 실제로 앙드레 드랭과도 교류했다고. (내 미술 안목....)
https://sollos.tistory.com/1187
정확히 위 작품은 아니지만, 암스테르담의 가을을 그린 작품들도 너무 좋았다.
노란색 가을에 흠뻑 젖어드는 듯한 풍부하고 황홀한 느낌.
나도 이런 순간들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또 아름다워서 좋아한다.
계절이 변하며 색이 바뀌는 순간들, 내내 초록이기만 했던 잎들이 다양한 색으로 물들어 풍성하게 흔들릴 때의
그 아름다운 순간들, 아름다워서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들.
작가가 생각하는 아름다움과 행복의 순간들에 나는 힘껏 공감했다.
정우철 도슨트가 말하길, 앙드레 브라질리에는 시대적으로는 전쟁을 겪었고 개인적으로는 자식을 잃는 아픔을 겪었지만
그의 그림 인생 80년동안 따뜻하고 행복한 순간들을 주로 그렸는데,
그림을 통해 삶의 아름다움을 전달하고자 하는 작가의 신념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앙드레 브라질리에라는 작가에 대한 도슨트의 해설을 들으며,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마치, 그림들이, 그리고 아흔넷의 작가가 내게
삶이 결코 만만하지 않지만 그래도 삶은 행복하다고, 너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응원과 격려를 건네주는 것 같았다.
내가 영화보고는 울어도, 그림보고 운 적은 없는데
도슨트의 해설이 끝나는 지점에서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남들 볼까봐 눈물을 훔쳤다.
50여분간의 도슨트 해설이 끝나고, 찬찬히 그리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작가의 작품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전시관 한 켠에 마련된 영상물을 보게되었는데 그 영상물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회화를 그리는 이유는) 이 감정들을 포착하고 나누고 당신을 살아가게 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작가는 단순히 풍경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들을 그림으로 남기면서 이 그림을 보는 관객들에게,
치열한 삶의 전투에서 지지 않고 살아가게 하려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힘과 의지를 주려고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행복하길 바라면서
많은 작품들을 남겨온 것이었고, 그런 작가의 의도가 담긴 그림에 마음이 울렸던 사람이 바로 나였다.
서른 중반. 동갑내기 남편과 종종 하는 얘기가 사는게 힘들다는 것이다.
힘들게 산다는 것이 아니라, 산다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얘기다.
세상살이, 돈 벌이, 회사생활, 뭐 하나 쉬운 게 없다.
지난 연말 집을 구하러 다니면서도 수십 번 생각했다.
뭐든지 엄마가 다 해주던 시절이 제일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어른으로 산다는게 너무 무겁고 힘들다고.
전쟁도 겪고 아이도 잃은 아흔넷의 일면식도 없는 작가가
내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해주는 따뜻한 격려와 응원에
서른 중반의 허무주의자,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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