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좋은 날

■ 삶/II. 삶 2017. 8. 30. 14:52

 

청명한 아침이었다.

어제 내린 비로 하늘은 깨끗하고도 멀게 느껴졌고

햇살 사이로 부는 오전의 바람은 쾌청하고도 제법 차갑게 느껴졌다.

 

잠시 커피를 사러 건물 밖으로 나왔다가

밝은 햇빛,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나는 가을이 왔다라는 생각보다도

북미같다 또 유럽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곳은 이런 건조하면서도 상쾌한 바람이 불더라.

 

그리고 아무런 맥락없이

7~8년전 쯤, 스페인의 그라나다에서 매일 아침 먹었던

커피와 갓 구운 바게트토스트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 때 그라나다 날씨는 오늘 같지도 않았는데.

그 때 그 커피, 그 때 그 고소했던 토스트 향기.

참 좋았었지.

 

그라나다에서 3일 아침을 있었던가,

세비야로는 어떻게 이동했었지?

그 때마신 커피가 에스프레소였나 라떼였나.

이제 디테일한 기억들은 모두 희미해졌는데

그 때 그 그라나다에서의 커피와 토스트가 좋았더라는 추억만 남다니.

 

문득, 죽기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은 쾌청하고 바람은 시원하고 햇살은 좋은 날.

특별한 일 없어도 날씨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날.

그 때 그 그라나다에서의 커피와 토스트가 참 맛있었지!

라고 흐뭇하게 떠올리며 죽을 수 있다면

그런 순간에 죽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죽을 수 있는 순간을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행복한 죽음일 것 같다.

 

오늘, 참 죽기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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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oney,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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