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를 냈다.
사실 절실하게 쉬고 싶은 것은 지난 주였는데, 어쩌다 보니 이번 주에 쉬게 되었다.
휴가는 냈는데, 어떤 특별한 계획이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집에서 밍기적 거리고 싶지는 않고.
최근, 라울 뒤피 전시를 볼까 했다가 전시기간이 종료되는 바람에 놓친 기억이 있어
다른 괜찮은 전시회가 있나 싶어 검색했다가, 환기미술관에서 김환기 탄생 110주년을 기념해서
점점화(點點畵) 전시를 며칠 전부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마침 김환기 화백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 중 한 명이기도 해서 (지금 우리집 거실에 걸린 작품이 김환기 화백의 1950년대 작품이다)
망설임 없이 가 보기로 했다.
사실, 그 동안 휴가는 뚜렷한 목적이 있을 때만 내기도 했고, 또 휴가든 휴일이든 시간이 나면 대개 도리랑 시간을 보내거나
아니면 짬내어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느라 최근 몇년 간 오롯이 혼자만의 긴 하루의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결혼을 하고 나이가 들면서, 환경도 변하고 삶의 우선 순위가 바뀌어서 나 혼자만의 시간은 항상 다른 일에 밀려왔던 것이다.
오늘도, 시간이 난 김에 엄마랑 식사를 할까 아니면 엄마랑 전시회를 같이 갈까도 잠깐씩 충동이 일었는데
오늘만큼은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누군가와 교류하지 않고, 내 마음 속 이야기를 들으면서
바닥나버린 에너지를 차곡차곡 채우고 싶었다.
휴가인데, 출근할 때 보다 30분은 일찍 일어나 회사 근처에 새로 등록한 골프 연습장에 가서
아침 9시부터 골프레슨을 받고 집에 돌아와 간단히 점심을 차려 먹었다.
원래 계획은 점심을 먹자마자, 환기미술관에 갔다가 어디 풍경이 좋은 카페에 가서 블로그를 쓰는 것이었는데
환한 대낮에 집에 혼자 있는 느낌이 나쁘지 않아 순서를 바꿔 집에서 (아직 공개하지 않은) 블로그를 한 편 썼다.
특별한 일을 하지 않는데도, 자꾸만 콧노래가 나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모처럼만에 사람들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사실에 신이 났었나보다.
아니면, 내 시간을 내가 주체적으로 쓰다는 느낌이 행복했던 것 같기도 하다.
사회가 정해준 출근시간에 맞춰, 팀장님이 배정해주는 일을, 현업이 요구하는 시간 안에 해내야 하는 삶을 살다가
나의 바람과 필요에 따라, (남편과 조율하는 일도 없이) 내 시간을 어떻게 쓸지 결정할 수 있어서.
그렇게 오랜만에 노트북을 열어 나의 세계에 빠져있다가 오후 3시쯤 환기 미술관으로 향했다.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내려서 부암동 골목을 걸어 올라갔는데
평소 올 기회가 없었던 낯선 동네, 낯선 풍경, 낯선 가게들.
도리와 차를 타고 다닐 때는 빠르게 지나가버려 잘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오늘따라 왜이렇게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던지.
호기심을 몽땅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어디를 가더라도 항상 도리와 함께 다니며 도리와 교감하고 대화하다보니
오히려 그만큼 세상에 눈을 돌리기 어려워서였을까?
나혼자 오롯이, 어떤 생각이나 감정도 뱉어내지 않고 내 안에 머물게 두며 구경하고 또 걷는 시간이 참 좋았다.
그렇게 환기미술관에 도착했다.
언덕길을 걸어오른 숨을 잠시 고르고, 점점화의 전시가 열리고 있는 본관에 들어갔는데
때마침 도슨트 프로그램이 막 시작하고 있어 운좋게 해설과 함께 김환기 화백의 작품들을 감상을 시작했다.
이번 점점화는, 1970년부터 1974년까지 김환기 화백의 점화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그 흐름을 따라가보는 전시이다.
작품설명은 1층에서부터 시작하여 3층으로 올라갔다가 2층, 그리고 다시 1층으로 내려오며 진행되었다.
김환기 화백의 점화는 그가 뉴욕에 머물던 1960년대 중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다.
처음에 그는, 뉴욕 타임즈 신문지 등에 유화물감으로 점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때의 작품들을 보면, 점 하나하나가 또렷하고 그 존재감과 의미를 담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1970년즈음이 되면 김환기 화백의 유명한 점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와 같은 작품이 등장한다.
이때만 하더라도, 그의 점화는 동그란 점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하얀색 사각형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구성이 단순한 평면의 느낌을 준다. 물론, 점의 색과 농도를 달리해서 높낮이가 있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말이다.
1971년도 작품에서부터는 점화의 평면구성에 변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점으로 만들어진 가로선의 나열 구성에서, 화면을 사선으로 분할하기도 하고, 동심원 형태로 뻗어나가기도 하고.
그리고 초반 작품에서는 점 하나하나가 또렷한 느낌이었다면, 시간이 지날 수록
점의 밀도가 높아지고 점 하나하나의 개성은 약해지면서,
점화의 점들이, 점보다는 선으로, 선보다는 면으로 다가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가 1973년이 되면, 점화에 또 다른 변화가 나타는데 그 동안 화면에 빈틈을 주지 않고 구성에 변화를 주었다면
1973년도 작품부터는 구성의 경계가 되는 지점을 의도적으로 비워놓아 그 변화가 더 또렷하게 느껴진다.
그동안 미디어에 많이 노출된 작품들이 주로 1971년에서부터 1972년 작품들이었는지 보자마자 친숙한 느낌이 들었는데
1973년이후의 작품부터는 처음보는 작품들인 것 같았다.
1973년 이후의 작품들은 많이 알려진 작품(a.k.a. 경매에서 비싼 가격에 낙찰된 작품)들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내 눈에 익은 작품들이 아니라서, 신선하고 새로워서 좋았다.
그 중 아래 그림은, (작가가 의도한 바를 알 수 없으나) 나뉘어진 모습이 구릉같기도 하고
김환기 화백이 뉴욕에서 우리나라의 산세를 생각하며 그렸던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환기 화백은 1974년 7월에 수술을 받고서 돌아가셨다) 1974년 작품에는
또 다른 변주가 나타는데, 화면을 분할하는 하얀색 틈 가운데 작은 동그라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몸이 좋지 않아서였을까? 그 동안의 작품들은 굉장히 컬러풀하고 비비드한데 1974년 작품들의 색감은
굉장히 어둡다. 아래 작품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에 완성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렇게 약 30분간의 도슨트 설명이 끝나고 나서 이번 점점화의 포스터를 보았더니,
(단순히 색감을 고려한 배열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을 시간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었다!
도슨트 프로그램이 끝나고 다시 한 번 찬찬히 작품들을 혼자서 감상해보았다.
평일이면서 관람 마감시간에 임박해서였을까 전시관 내부는 사람이 거의 없어 고요했다.
마치 내가 이 전시관을 대관해서 혼자 관람하는 것 마냥.
사람이 없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환기 미술관이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는데,
(SNS의 시대에 인증샷을 남기지 못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이 아름다운 작품들에 온전히 집중해서 관람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지난 여름, 파리에 놀러갔을 때 모네의 수련 연작을 보러 오랑주리 미술관에 갔었는데,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보다, 그 그림앞에서 인증샷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솔직히 말하면 다 인증샷만 찍으러 온 것 같았고, 틱톡인지 릴스인지 영상을 찍겠다고 그림앞을 수십번 걷는 사람도 있었다.
그건 그것대로 싫었는데, 또 나도 괜히 인증샷 한 장 남겨야 한다고 부화뇌동해서
인증샷 찍을 틈을 찾은라고 그토록 보고 싶었던 모네의 연작을 집중해서 보지 못하고 마음만 조급했던 기억이 있다.
어쨌든, 운좋게 도슨트 프로그램으로 점점화 전시에 대한 설명까지 듣게 되어서 더 흥미롭고 알찬 관람이었다.
김환기 화백의 그림을 좋아하기도 하고 그림 자체가 주는 영감이 있어서 해설이 없어도 충분히 좋았겠지만
해설 덕분에 점화를 실험하던 시절부터 점화를 완성하고 이를 변주해나가기까지의
그 시간과 변화의 관점에서 작품들을 이해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그리고 오늘, 하루 혼자 있는 시간도 좋았다.
남들이 다 일하는 시간에 여유롭게 골프 레슨을 받고,
환한 낮에 버스를 타고서 차창밖으로 잘 모르는 서울 동네를 구경하고,
한적한 부암동의 골목을 두리번 거리며 걷고
좋아하는 화가의 작품을 보고 느꼈던 시간.
정말이지, 나를 채우는 시간이었다. 충만하고 행복했다.
(충동적으로 미술관 샵에서 김환기 화백의 뉴욕시절에 대한 책도 사들고 나왔다.)
환기 미술관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다시 돌아가는데,
문득 이렇게 아직까지 좋아하는게 남아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매일 똑같은 루틴의 삶을 살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현재의 삶이 안정적이고 행복해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열렬히 좋아하는게 없어져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한 순간에 깨달은 것은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깨달았고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어느 순간에는 그것을 인정해버리고 있었던 나였다.
그런데 오늘, 아주 오랜만에 내가 김환기 화백의 작품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정말 나를 채우고 힐링하고 사랑하는,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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