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기티

카테고리 없음 2010. 3. 16. 18:30




환경이 바뀌어서 낯선 것,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지만
환경이 바뀌어서 그동안 자주 만날 수 없던 옛 지인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도 같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릴 것이라고 일기예보가 호들갑을 떨었던 오늘,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준호K와 후생관에서 점심을 함께 했다.
북적북적한 후생관에 마주앉아 밥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준호를 알게된지는 6년, 다시 만난지는 4년만인데도
준호는 내가 알던 김준호, 너무 그모습 그대로여서 편안하면서도 어쩜 이리도 변하지 않을 수 있는건지 의아할 정도였다. 

밥먹는 그 짧은 시간동안,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 근황을 묻고 공부 얘기도 나눴는데
같은 학교 학생이 되어서 마주하고 있는게 재미있기도 하고
내가 기억하는 김준호의 모습들이 뒤죽박죽 뒤섞여서 지금의 준호를 보며 그때의 준호도 함께 보는듯한 착각도 들었다.


막 고등학교 시절을 벗어나려던 18살의 끝무렵에 불쑥 나타났던 녀석.
이제 막 대학교 원서를 쓰면서 한치의 망설임 없이 '서울대 법대'를 또박또박 말했던 -
가장 불안했던 시기에 서로의 합격을 진심으로 바랐고, 또 새로 시작할 날들을 함께 축하했던 친구였고.
한참이나 어리고 다듬어지지 않았던 생각들을 정말 치열하게 솔직하게 나눴던 그런 친구였는데
지금 되돌려 생각해보면 무슨 얘기를 그리도 심각하게 나누면서 세상고민, 자기 고민을 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얘기들을 부담없이 나눌 수 있고, 또 나의 가치관에 대한 준호의 견해를 스스럼없이 들을 수 있어서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 조금씩 스스로 알아가는 시간이었음은, 
비록 그 구체적인 내용이 생각나지 않더라도 , 분명 그랬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학교가 갈리고, 과가 갈리고, 서로 가는 길에 달라지면 어느 누구나 그렇듯이
서로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 삶을 사느라 연락이 뜸해지고 한참을 잊어버리고 살았던 적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준호를 본게, 교환학생을 가기 한 학기 전의 조금 추운 봄날이었는데 -
휴학하며 여유를 즐기고 싶지만, 남들보다 뒤쳐질까 조급해하던 그때의 나에게
준호는 준호 특유의 그 차분한 말투로 잠시나마 뛰던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어 보라고 말했었다.
가만히 서서 남들이 뛰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그리고 그 순간을 버텨내는 것도 겪어야 할 일이라고.

또, 지금 그 시간이 앞으로 우리의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를 -내가 2년뒤에야 느꼈던- 그때의 준호는
내가 처음 봤을 때 '서울대 법대'를 말했던 그 또박또박한 말투로 말해주었었다.
내가 어떤 목표를, 어떤 방향을 향해서 뛰고 있는지를 똑바로 보고 뛰어야 한다고.
뒤쳐지기 싫은 마음으로 무작정 뛰기만 하다가 시간이 흐르고 내가 그 뛰던 길에서 어느 위치에 올라섰을 때,
그제서야 내가 뛰던 길이 실은 내가 뛰고 싶은 길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다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겠냐고-
그러니까 뛰어보고 싶은 길이 있다면, 아직은 실패해도 얼마든지 되돌아갈 수 있는 지금 뛰어봐야 하고 
또, 그 뛰어보고 싶은 길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무조건 달리기만할 게 아니라, 
잠시 멈춰서서 내가 어느 길을 뛰고 싶은지, 남들은 어느 길을 뛰는지 차근차근 내 앞길을 바라봤으면 좋겠다고
마치 나보다 10년은 먼저 살아본 인생의 경험자처럼, 이제 막 방황을 시작하는 나에게 정답을 슬며시 알려주었었다.
그땐 머릿속으론 이해하지만, 차마 실천할 수 없었던 준호의 그런 조언들을 
나는 방황했던 2년이 지나고 나서야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 진심으로 깨달을 수 있었고
나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서, 그리고 확신을 위해서 지난 1년 가까이 내가 뛰어가야 할 길을 찾아 헤멜 수 있었다.




멀쓱했던 생김새도, 공명이 일어나는 듯한 특유의 목소리와 나긋나긋하면서도 또박또박한 그 말투도
준호는 내가 처음 봤던 19살의 준호 모습 그대로였다.
달라진게 있다면 우리는 더이상 어렸을 때 우리가 고민했던 것들을 함께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

이제 막 법학공부를 시작하는 나에게 '진심으로 건투를 빈다'라고 말하는 준호에게,
넌 어쩜 그리 하나도 변하지 않았냐고 - 말했더니
준호는 씨익 웃으면서  -너도 그때랑 똑같아, 여전히 애기티가 나- 라고 대답했다.
18살도 아니고, 24살이나 된 대학원생한테 애기티라니, 너가 화장한 내 모습을 못봐서 그런거라고 바득바득 우겨봤지만
'너가 30살이나 되면 모를까'라며 내 말을 들은체도 안하는 그녀석 대답에서
나는, 준호를 만난지 6년이나 되어서야, 준호가 그동안 내게 슬쩍 슬쩍 말했던 그 '애기티가' 정말 무슨 의미인지
이제서야 어렴풋이 -  알 것- 같았다.







Posted by honey,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