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7일 PART 1. DEPARTURE

차에서 내리자마자 영하 9도의 날이 선 차가운 바람에 깜짝 놀라 허겁지겁 캐리어를 내렸다. 

바람이 너무 차가워서 라이드를 해 준 동생에게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서둘러 공항으로 들어왔다. 

생각해보니, 나의 여행기는 항상 '햇살이 이글거리던 7월의 어느 토요일',

'후덥지근하고 끈적이는 연일 폭염이라고 떠들어대는 그런 날이었다' 같은 문구로 시작했었는데 

칼바람 부는 날에 공항이라니- 

낯설다. 

 

사실 지금 이 모든 것들이, 이 모든 순간이 낯설다.

코로나가 시작된지 만 2년이 되어 나가게 된 해외여행도, 텅텅 빈 공항도, 

사람이 없어 순식 간에 끝나버리는 출국 수속도. 

어느 날, 정말 해외여행을 가게 되어 공항에 오면 설레고 신날 줄 알았는데 

그 설레고 신나는 마음은 모두가 자유롭게 여행을 떠날 수 있던 그 날들의 북적거림에서 오는 것이었구나.

텅텅비어 휑하고 썰렁한 유령도시 같은 공항은 어쩐지 내가 기대하던 그런 공항이 아니었다. 

 

정말 썰렁하기 그지 없던 인천공항 제2터미널

 

부기장인 동생이, 요즘 공항에 사람은 없어도 음성확인서 같은 서류확인 때문에 수속에 오래걸린다고 겁을 줬는데

조언이 무색하게 엄청난 속도로 출국 수속을 마쳤다. 출국시간까지 무려 3시간 반이 남았...

다행히 내가 모닝캄 자격이 있는데 이번에 하와이까지 대한항공을 타게 되면서 도리도 KAL 라운지에 데리고 들어갈 수 있었다. 

라운지에서 폭풍 일정을 짜다가 어느 새 비행기 탑승 시간이 되어 탑승을 시작했다.

난 다시 해외에 가는 비행기를 타면 정말 설렐 줄 알았는데, 이상하리만큼 내 마음은 덤덤했다. 

타면서 보니까, 다른 신혼부부(?) 커플들은 나란히 앉아서 애정 어린 셀카를 찍던데 

결혼 1년 반 만에 신혼(?)여행 가는 우리에게는 애정보다 체력 비축이 더욱 중요하닷.

3-4-3 좌석에서 누워가기 위해 각자 다른 열에 앉았다....눕코노미가 최고임니닷. 

 

신혼(?)여행인데 따로 앉아가는 신혼(?) 부부

 

오미크론 변이가 델타보다 감염력이 높다고 해서 기내식도 스킵하고 4개의 좌석 팔걸이를 모두 올리고 누웠다. 

밤 비행기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몸은 피곤한데 정신은 말똥 말똥해서 잠이 안온다. 

 

결혼식을 올리고 1년 반 만에 가는 신혼여행이다. 

코로나 시국인 걸 감안해서 신혼여행지도 스페인에서 하와이로 바꾸고, 작년에 못 쓴 경조휴가 사용도 허락 받았건만

출발하기 전까지 너무 돌발 변수가 많아서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많이 되었다. 

우리는 출국 전에 코로나에 발목 잡힐까봐 무서워서 3주 전부터는 모임도, 외식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 오미크론 변이가 발견되면서 자가격리가 부활해버렸고, 

그러고도 출국 3일을 앞두고는 새벽에 목이 아프고 열이 나서 코로나에 걸렸을까봐 벌벌 떨며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내가 하와이를 가는 걸 아는 친구들이 잘 갔다오라며 카톡으로 인사를 해줬는데 

어쩐지 난 실감도 나지 않고 설레지가 않는다. ಠ_ಠ

그렇게 기다려왔던 해외여행인데?!?!

남들은 쉽게 가지 못하는 해외여행인데?!?!

인스타그램에서 해외여행 하는 셀럽들을 보고 그렇게 부러워해놓고??!!

 

쉽게 잠이 오지 않는 비행기 속에서, 가만히 생각해본다. 왜 설레지가 않는지. 

이 여행을, 나는 즐기러 가는게 아니라 미션을 수행하러 가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나기 전에 신혼여행을 가야 한다는 미션,

회사 경조휴가를 써야 한다는 미션, 

무엇보다도, 가서 절대 코로나에 걸려서는 안된다는 미션. 

사실 이 부분이 가장 걱정이 되었다. 최대한의 조심을 하겠지만 우리가 컨트롤 할 수 없는 부분도 있을 것이기에. 

그런 걱정과 긴장감으로 여행가는 기분이 설레지 않고 마음이 무거웠던 것 같다.

 

 

그리고 날씨라도 좋았으면 좋으련만, 하필 우리가 가는 7일 동안 첫 이틀을 빼고 5일 내내 비소식이 있어

(몰랐는데 하와이가 겨울에는 우기라네요?...ಥ_ಥ)

이틀 동안 중요한 포인트들을 모두 둘러봐야한다는 부담감까지 안고 있었다. 

하와이를 고를 땐, 따뜻한 햇살 아래 바다를 보며 멍 때리는 순간을 상상했는데

생각보다 강행군이 되겠다. 미안하다 도리야. 

 

너무 오랜만의 여행이라 이런 창문샷도 찍어봤음. 

 

이런 저런 생각으로 마음은 심란한데, 어느 새 비행기가 서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뒷바람이 밀어주어 예상시간보다 40여분이나 빠르게 우리는 하와이 오아후 섬의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이 생각보다 많이 낡고 작은데다 일단 야자수가 보이는 풍경이 어째 제주공항이랑 비슷하다????? 싶었는데

공항에 발을 딛은 이후로는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며칠 묵을거냐는 질문 하나로 입국 수속이 끝났고, (신혼부부 같아보였나 봄?) 

렌터카를 픽업할 때도 대기 없이 모든게 후루룩 끝났다. 

그래도 신혼여행이라고 돈을 쪼끔 더 써서 컨버터블을 빌렸는데 

직원이 컨버터블이 세워져있는 주차구역에 우릴 데리고 가더니 여기 주차된 컨버터블 중에 원하는 차를 아무거나 뽑아가라고. 

네. 그럼 저희는 빨간 머스탱으로 데려가겠습니다. 신혼여행인데요 암요암요. 

 

지금 아니면 언제 타보겠냐구, 빨간 머스탱이로 골랐다!
컨버터블의 로망과 자외선이 내리쬐는 현실과의 괴리....뜨겁다...

 

풀커버 보험을 넣었지만 꼼꼼하게 차체 흠집들을 체크를 하고, 드디어 와이키키를 향해서 출발!

신행이니까 촌스럽게(?) 컨버터블 뚜껑을 열고 달리기 시작했는데, 

자외선은 일광소독급으로 따갑고 하이웨이라 속도가 있어 바람에 머리카락이 뒤집어진다. 

잠깐 차가 멈출 때 부랴부랴 뚜껑을 덮었다. 

컨버터블이 보기에 간지나보여도 실제로는 이런 고충이 있네요?

 

20여분을 달리니 어느 새 와이키키의 건물들 사이로 차가 진입하기 시작했다.

와이키키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도, 어떤 이미지조차도 없었는데, 

한 낮의 햇살을 받은 거리는 밝고 화창했으며, 가벼운 옷차림의 사람들로 활기찬 분위기였다. 

우리는 첫번 째 호텔인 쉐라톤 와이키키에 셀프파킹을 했고, 

오전 11시였는데 얼리 체크인이 가능해서 바로 체크인을 했다. 

우리 방은 24층. 처음에 예약할 때 좋은 전망을 위해 고층을 달라고 했었는데, 정말 고층을 줬다.

설레는 마음으로 우리가 배정받은 방문을 열었는데,

 

탁 트인 바다. 소리질러!

 

야자수와 함께 하와이 느낌이 물씬 풍기는 쉐라톤 와이키키의 인피니티 풀 

 

창 밖으로 보이는 탁 트인 바다 풍경에 도리와 나는 동시에 우와! 환호성을 질렀다. 

저 먼 바다는 코발트 블루인데, 해변 쪽으로는 에메랄드 빛이 영롱하게 반짝반짝이는 모습에 

정말 오랜만에 예쁜 바다를 보고 설레었다. (❁´◡`❁)

바다를 보고 설레었던 적은 2008년, 이탈리아 남부 포지타노 이후로는 없었던 것 같은데.

나에게 바다는 커다랗고 깊은 물 덩어리. 수면 아래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라는 인식이 강해서

바다를 보고 있어도 설렌다거나 크게 감흥이 생기진 않는데 

여기 호텔 테라스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는 넓게 펼쳐져있는데도 뭔가 얕은 느낌. 

저 위치까지 사람이 나가 있어도 되나? 싶을만큼 먼 곳까지 사람들이 서핑보드를 타고 패들링을 하고 있어서

신기하다는 생각과 함께 나도 한 번 물에 들어가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감동도 잠시, 내가 오션프론트를 예약을 할 때는 다이아몬드헤드가 보이는 방이라서 비싼 돈을 주고 오션프론트를 했는데

내 방은 다이아몬드헤드가 안보이는 그냥 오션프론트였다. ಠ_ಠ

 

(출처 : Sheraton waikiki 홈페이지 - Oceanfront room)

 

도리가 프론트에 전화를 걸어 다이아몬드헤드가 보이는 방으로 바꿔줄 수 있냐고 물어봤고,

처음엔 방 분류가 다르다고 하더니 곧 방을 바꿔줄 수 있으니까 다시 키를 들고 내려오라고 했는데

갑자기 무슨 변덕이었을까? 이 탁트인 바다와, 또 아래에 인피니티풀만 보이는 풍경이 심플하게 마음에 들어서

이 다이아몬드 헤드가 보이는 방으로 바꾸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어쩌면, 밤 새 잠 못자고 비행을 한데다 갑자기 한 겨울에서 한 여름으로 날씨가 바뀌어 몸과 정신이 힘든 상태에서

뷰 때문에 방을 또 바꾸는, 같이 여행하는 도리에게 예민까칠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던 마음도 있었다. 

내가 방을 안바꾸겠다고 하자마자 도리는 침대에 풀썩 눕더니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어쨌든, 드디어 하와이에 도착했다. 

난 사실 휴양지 파가 아니라서 하와이에 와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었는데, 

코로나와 겨울이라는 조건 속에서 해외여행을 갈 때 가장 안전한 선택은 휴양지라고 생각을 했다.

(해외여행을 가기로 한 순간부터 모든 음식은 다 테이크아웃을 해서 먹는 조건으로 얘기했다)

우리가 여행을 고민할 당시 가능한 옵션은 몰디브, 하와이, 사이판이 있었는데

바다와 도시의 교집합이면서 여러가지 액티비티를 할 수 있는 곳이 하와이라서 하와이를 골랐다. 

 

그래도 아침 비행기에, 렌트카, 호텔 체크인까지 모든 게 빠르게 이뤄진 탓에 아직 한 나절의 시간이 남았다.

원래 계획은 첫 날 와이키키정도만 돌아다니고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며 남은 여행을 위한 체력을 비축할 생각이었지만

해 뜨는 날이 이제 오늘, 내일 이틀 뿐이라면서요????

비 올 때나 쉬면서 체력을 비축하도록 하고,

오늘이라도 바짝 돌아봐야한다는 각오로 도리를 한 시간만 재우고 깨워서 나가보겠습니다. 

Posted by honey,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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