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관계라는 것이 버거울 때가 있다.
그것이 잘 굴러가고 있을 때조차도,
타인, 그리고 그 사람과의 관계 자체를 염두해두어야 한다는 것이
마음이 무겁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특히 그것이,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그러나 내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
'변수'라는 점이 부각될 때는
더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혼자일때의 그 홀가분함은 더 이상 없다.
때로 내가 결정할 수 없는 타인의 일인데 내가 그 영향을 걱정을 해야할 때는
내가 마치 큰 돌에 발이 묶여 날아오르지 못하는 새 같다.
푸드덕거리고 있지만 날아갈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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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라는 것은 결국 '나'와 '너'의 합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결국 '나'라는 것이 없으면 '우리'라는 것도 없다.
'너'와 '너'는 '너'일뿐.
그러므로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결국 '나'를 오롯이 지켜내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다.
'우리'라는 관계 속에서 '나'가 사라지거나 '나'가 '너'가 되어버리는 순간
'우리'라는 것은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우리'와 '너'를 헷갈려서는 안된다.
'우리'가 좋은 나머지 '너'만 쫓아가서는 안된다.
서로에게 좋은 울타리가 되어 주는 '우리'를 만들어나가면서도
그 주체로서의 '나'를 잊어서는 안되고
'너'에 대한 배려를 넘어 '나'를 잃어서도 안된다.
'우리'의 영역을 확장시키면서도 '나'의 중심은 견고하게 남겨두어야 한다.
종종 나는 이 명쾌한 사실을 잊어버리고서는
'우리'와 '너'의 경계를 어지럽히고
'우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너'를 좇느라 '나'를 잃어버리곤 한다.
그것이 과하면 '우리'속에서 '나'는 사라지고 '너'만 2명이 남아 '너'가 되어 버리고 만다.
사랑하고 배려하면서도 '나'를 잃지 말 것.
이해하고 양보하면서도 '나'를 버리지 말 것.
'나'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
잠시 정신이 어지러울 때는,
시간을 두고서 천천히 내 자리로 돌아올 줄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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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 행복의 주체는 내가 되어야 한다.
내 행복을 타인에게 맡기면 때론 힘들이지 않고 행복할 수도 있겠지만,
대개 내 행복을 쥐어준 대가로 나는 끌려다니게 된다.
내가 스스로 나를 가꾸고 행복할 줄 알아야 한다.
상대방을 바라보면서도 나에게 집중하고 또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있고 그러고 나서야 사랑이 있고 그러고 나서야 우리가 있는 것이다.
집중과 연습이 많이 필요하다.
말은 쉬운데 항상 실천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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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모든 일의 시작보다 유지가 어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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