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낮.

날씨는 화창하고 어제보다 바람이 덜 불어서 한결 날씨가 좋게 느껴진다.

거리에는 생동감이 넘친다.

중앙역과 스토크만 백화점 사이는 관광객들과 (아마도) 헬싱키 시민들로 혼잡하긴 하지만

러시아에서처럼 불쾌하게 붐비는 정도는 아니다.

 

K와 J를 키아즈만 미술관으로 보내고

나는 너덜너덜한 헬싱키 종이지도를 보고서

마음이 닿는 곳을 정했다.

바로 중앙역 뒷편에 있는 Töölönlahti (퇼른라흐티) 만(Bay)의 커다란 호수.

블로그에서도 딱히 소개된 걸 본적이 없었지만

이 햇살 좋은 오후를 보내기엔 적당한 곳일것만 같아서.

 

 

 

 

 

Töölönlahti (퇼른라흐티) 호수를 찾아 가는 길은 넓은 잔디밭을 가로질러야 하는데

중앙역 바로 앞이 그렇게 혼잡했던 것과 딴판으로

그 바로 뒷편의 세상은 마치 어느 대학교 캠퍼스에 흘러들어온 듯이 한적하고 평화로웠다.

들판을 쭉쭉쭉 가로질러 어느새 호숫가에 닿았다.

 

 

 

 

 

 

Töölönlahti (퇼른라흐티) 호수가의 하얀 자작나무.

 

 

 

 

호숫가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는 핀란드 학생들

 

 

 

 

 

호숫가를 따라 울창한 가로수가 서있는 산책로를

나는 시계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걷다보니 카약을 빌려주는 작은 상점도 있었고

호수가를 바라보며 따뜻하게 커피 한잔 즐기는 여유로운 헬싱키 시민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이 길을 유유자적 걷고 있는 나 말고,

이 산책기에 있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트레이닝 복을 입고 뜀박질을 하는 헬싱키 시민들 뿐.

 

일단 이 벌건 대낮에 청년들이 일은 안하고 어떻게 운동을 할 수 있는 걸까?...

하는 의아함은 둘째치고

너도 나도 할 것없이 다들 열심히 뛰는 모습은

또(!) 밴쿠버를 떠오르게 했다.

밴쿠버에서도 정말 남녀노소할 것없이 동네방네 조깅하며 뛰어다니는 시민들을 볼 수 있는데

조깅을 밥먹듯 하는 장면은 밴쿠버에서 처음 봤기 때문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달까?

그런데 여기 헬싱키도 만만치가 않네.  :P

 

(헬싱키와 밴쿠버 자체 배틀 중)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호수가를 따라 크게 반바퀴 정도 돌았다.

지도상에는 그래도 꽤 커보이는데,

헬싱키라는 도시 자체가 워낙 작기 때문에

지도상에 커보이는 호수조차도 막상 걷다보니 그리 큰 것도 아니었다.

 

 

 

 

 

 

우연히 만난,

헬싱키에서 마주한 최고의 순간.

수풀과 나무잎 사이 너머로 햇살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호수의 표면과

그 속에서 편안히 휴식하는 이.

 

 

고요한 가운데 편안한 휴식을 생각하면 난 이 장면이 떠오를 것만 같다.

휴양지 같은 해변에서 드러누워 휴식하는 그런 장면 말고.

정말 내가 상상하고 꿈꾸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그런 휴식.

 

 

분명 같은 장소, 같은 시간 속에 있는데도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장면이

마치 비현실적인 것도 같다는 생각과 함께

토끼굴 너머의 다른 세상을 엿보는 것만 같은

몽환적인 느낌마저도 들었다.  

 

 

 

 

호숫가의 카페에 앉아 도란 도란 담소를 나누는 연인.

 

 

나는 크게 호숫가를 둘러 인적이 드문 한 벤치에 앉았다.

머리가 아파 조금 쉬고 싶기도 했고,

이 햇살이, 이 바람이 잠시 쉬어도 된다 하는 것 같아서.

그러다 나는 (누움 병이 도져서) 벤치에 누워버렸다.

 

 

 

 

 

 

하늘 투명하리만큼 맑고 깨끗하다.
구름 한 점 없다.
하늘은 원래 이런 빛깔이었구나.
마치 하늘을 처음본 것처럼 감탄하며 비라본다.
자작나무의 동전잎같은 나뭇잎들이 바람결에 차르라니 흔들린다.
바람이 차다. 그런데 나의 청바지에 닿는 햇살이 따사롭다.
패딩잠바를 베개삼아 벤치에 누웠다.
타닥타닥 이 호숫가를 따라 조깅하는 사람들의 발딛음 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의 찬란한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온다.


앓던 병마저 나을 것 같이 깨끗하고 맑은 자연인데 나는 이유없이 머리가 아프다.

헛웃음이 나온다.
맑은 공기와 호수와 바다와 나무와 잔디와 질서와 친절.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은 다 이유가 있다.

 

 


2016. 08. 12.
Helsinki, Finland


 

 

셀카도...('ㅅ')a

 

 

 

 

 

너무 닳아서 너덜너덜할 때까지 가지고 다녔던

관광안내소에서 받아온 헬싱키 관광지도.

한국어로 된 관광지도여서 편하게 들고 보고 다녔다.

 

종이지도를 마르고 닳도록 보고다닌 덕분에 중요한 길 이름들과 방향을 다 외우게 되어서

나중에는 지도 없이도 마치 헬싱키 시민처럼 쭉쭉쭉 걸어다녔다는!

 

 

 

 

 

잔디밭에서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

어떻게 하면 이런 여유를 즐기며 살 수 있는걸까?

 

 

 

 

키아즈마에서 나온 K와 J를 만나 우리는 저녁식사를 하러

헬싱키의 남쪽 해안가를 향해 걸어가긴 시작했다.

시간은 이제 막 6시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길거리의 상점들은 이미 문을 닫고 내부는 텅 비어있어서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이 밝은 대낮에 문 닫은 상점들이라니.

약간은 유령도시를 걷는 듯한 오싹한 기분.

 

 

 

저녁을 먹은 곳은 Cargo Coffee + Vegeterian food.

헬싱키의 남서쪽 항구 근처에 있는 컨테이너처럼 생긴 카페인데 베지테리언 식사도 가능하다.

(한참 다이어트에 꽂혀서 베지테리언 음식도 잘 먹었던 때...........)

그리고 컨테이너 위는 루프탑구조여서 날씨가 좋으면 야외에서 식사를 즐길 수도 있다는 거!

하지만 우리는 조금 쌀쌀한 것 같아서 실내에서 식사를 마쳤다.

 

 

 

 

Cargo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외관

 

 

 

하늘을 뒤덮은 양떼구름, 참 이쁘다.

 

 

 

 

물론 헬싱키는 정말 준비없이 오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름 블로그들을 뒤적뒤적하면서 맛집도 찾아보고 했는데

그 어디에도 퇼른라흐티 호수를 소개하는 글은 보지 못했었다.

 

그저 헬싱키 지도를 펴놓고

이 햇살과 바람이 좋은 날

어디를 가보면 좋을까 생각해보다가

마음이 가는대로 따라간 곳인데

헬싱키에서 만난 순간 중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던 것 같다.

 

구경하는 곳이 아닌, 상품을 사고 파는 곳이 아닌

헬싱키 시민들의 여유와 쉼과 땀이 뒤섞여 있는 곳.

난 그게 너무 좋았다.

이방인이지만 그들의 삶 속에 잠시 초대받은 느낌.

 

헬싱키에 하루이틀 조금 여유롭게 머무를 시간이 된다면

나는 헬싱키 대성당 같은 곳 보다 (성당에 안간 1인 ;ㅅ;)

가이드북이나 관광지도에는 안내되지 않은 헬싱키 곳곳을 다녀보라고

워낙 작은 도시이니 자전거를 타도 좋고 걸어도 좋고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씩 느껴보시라고

추천하고 싶다.

 

 

 

오후 일정 정리 : 퇼른라흐티 호수 산책 → 카고커피

Posted by honey,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