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김연아의 경기를 보며 벤쿠버를 떠올리다가,
문득 나의 보잘 것 없는 기억력에 크게 상심했다.

갑자기, 그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막 캐나다 땅에 발을 디뎠을 때, 난생 처음 엄마아빠 품을 한국이란 곳을 떠났 던 날,
10시간의 고된 비행과 낯선 곳에 대한 경계, 북적거리고 정신없던 공항 그리고 끌기도 힘들었던 무거운 짐가방
겨우 한숨돌리며 찾았던 그 이름, 앙칼진 hi, there 에 말문이 막혔지만 -
나의 상상을 뛰어넘던, 나의 혀끝을 며칠이나 알딸딸하게 만들었던 그 핫초코.

매일 비오는 금요일 아침, 음침하고 공허한 스튜디오에서 아크릴 물감을 덧바르다
으슬으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뛰어가서 마셨던,
역시나 핫초코만큼이나 달달하기 그지 없던 그 핫카푸치노.
공허한 스튜디오를 가득 채웠던 그 카푸치노 향기.

매일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갈때면 날 잡아끌던-
발음하기도 어려워서 몇번이나 이름을 연습하고 주문해야했던 그 하니 크룰러

주머니에 달랑 5달러만 남겨놓고 카드도 없고 남은 돈도 없고 동행자도 없이
지도도 없는 낯선 몬트레올에서
돈이 없어서 아침 점심도 굶고, 차비가 없어서 하루종일 2달치 여행짐을 끌고 지하철 8정거장을 걸었던 그 날
배고프고 지친 방랑객의 배를 채워줬던 조금 뻑뻑했던 기억의 그 초코머핀


내 기억 구석구석 숨어있는 그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아 한참을 고민했다.
그래 팀홀튼.




1월 내내 화창하고 짱짱한 겨울날씨를 뽐내더니, 2월 들어 계속 뿌옇고 흐리고 으스스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사실 사무실안에만 있기 때문에 화장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 색을 보고 판단하기는 하지만.

이런 으스스하고 스산한 겨울,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오늘 이런 날씨가 , 떠오르지 않는 그 이름의 향기마저 달콤했던 핫 카푸치노가
벤쿠버를 그립게 만든다.
자꾸만 눈감고 벤쿠버를 상상하게 만든다.
내 머릿속에서 벤쿠버의 기억이 감겨 돌아가 흐릿흐릿하게 때론 현실과 환상을 착각할만큼 선명하게 펼쳐진다.



이때쯤 나는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새벽 3시, 4시까지 잠이 안오더니 어떤 날은 그냥 침대에 누운채로 7시까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하루이틀 잠을 안잤으면 다음날은 쓰러져 죽은 것 차람 잠을 자야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이틀 밤을 샜는데도 다음날 멀쩡하게 수업받고 밥먹고 수다를 떨고..
집중력이 조금 떨어지고 몸이 좀 피곤할 뿐이지 밤이 되면 또다시 오지 않는 잠을 부르며 힘들어했다.
뭐가 날 그렇게 잠못들게 만들었던 걸까.
못자고 일어날 때면 항상 짜증이 났다.
짜증난 얼굴로 블라인드를 걷으면
회색빛 하늘에 축축하고도 으슬거릴 것 같은 공기, 밤새 내린 비에 젖어 질척거리는 흙길을 걷는 학생들이 보였다.
한참을 그렇게 침대에 앉아서 창밖만 보고 있었다.
4월이 오기까지, 거진 3개월의 아침을 그렇게 비에 젖은, 구름이 가득한, 칙칙한 아침을 봐야만 했다.
그러다 잠이 너무 안와서 짜증나고 답답할땐
비너리가 문열기를 기다려 핫초코 한 잔과 쿠키하나를 들고
벤쿠버인들은 쓰지 않는 오색찬란한 우산에, 잠옷바지를 장화안에 구겨넣고
추적추적 주책을 떨며 렉비치에 갔었다.

렉비치로 내려가는 트레일은 밤새 보슬비에 젖어 미끄러웠고
비내리는 이른 새벽, 물이 가득 찬 바닷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은 커녕 새한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빗물때문에 불어난건지, 아니면 물이 차서인지
바닷물은 찰싹, 하지 않고 꿀럭 꿀럭 거렸다.
그냥 그렇게 가만히 서있으면 바닷물에 꿀럭꿀럭 먹혀들어갈 것 같았다.
괜시리 무서웠다.
내가 꿀럭거리는 바닷물에 홀려서 그 속으로 걸어들까봐 무서웠고
아무도 없는 바닷가여서 무섭기도 했고
비가 오는데 꺼지지 않고 연기를 내며 타들어가는 모닥불도 무서웠다.




이렇게 아지고 생생히 기억나는 추억들이 많은데, 기억들이 많은데
조금씩 조금씩 아찔하게 망각이 나의 추억들을 좀먹고 있다.
슬프고 슬프고 그립고 또 그립다.
특히나 이렇게 으슬으슬 비가 올 것 같은 날이면.
내가 가장 싫어했'던' 날씨인 날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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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oney,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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