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 주말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야수파 걸작전>에 다녀왔다.

미술전시를 열심히 찾아다니는 편은 아닌데, 최근에 <심미안 수업>을 읽고서 동기 부여를 받아 

얼리버드로 덜컥 예매해놓고는 얼리버드 유효기간이 끝나기 전에 시간을 내서 다녀왔다.

 

이번 야수파 걸작전은 프랑스의 트루아 현대미술관이 리노베이션을 진행하면서 트루아 현대미술관의 '레비 컬렉션' 의

원화 68점을 포함해 총 140여점을 전시되었다.

전시회에서는 야수파의 탄생과 당대의 작품들, 야수파 미술가들에 관한 스토리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놓았는데

미술 문외한이 야수파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데 나쁘지 않은 전시였다.

(참고로, 미술전시였는데 텍스트가 엄청 많아서 읽으며 소화해내느라 버겁긴 또 처음이었다. 

하지만 야수파와 각각의 화가들에 대한 배경설명이 많아서 그림들을 이해하는데는 훨씬 도움이 되었다.)

생각보다 전시된 작품이 많아서 텍스트를 읽으랴, 그림을 감상하랴 허덕이며 전시관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안드레 드랭에 관한 영상 작품을 관람하다가, 순간적으로 마음을 이끄는 작품을 만났다.

 

   André Derain."Charing Cross Bridge". London 1905-06 ㅣ MoMA

 

앙드레 드랭이 그린 30여점의 런던 연작 중,

노을이 지는 풍경(이라고 추측되는) 몽환적인 런던 하늘풍경을 담은,

< Charing Cross Bridge > 

채링크로스 다리와 런던도심의 배경 너머, 연노랑색, 연분홍색, 연하늘색, 노란색, 남색, 빨간색, 

거침없는 알록달록한 색채가 경계를 이루면서도 또 어색함 없이 어우러져 있었다.

하늘은 마치 단 하나의 하늘이니 그 색도 균일하여여야만 할 것 같은데,

혹은 노을이 질때처럼 그 색감이 다양하더라도 지평선을 따라 붉은빛부터 푸른빛까지 그라데이션으로 물들어야만 할 것 같은데,

커다란 하나의 하늘에 다채로운 색깔을 덩어리 채로 덧칠한 그 과감한 붓칠에

아!

1초 남짓의 순간에 지나가는 30여개의 작품들 중에서 단박에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야수파 걸작전의 대표격 그림인 앙드레 드랭의 <빅 벤> 보다도

<채링 크로스 다리>가 훨씬 더 강렬하게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아버렸다.

 

-

 

전시를 모두 보고서 나오는 길에 기프트 샵에서, 채링 크로스 다리의 판화본을 사고 싶었지만,

(해당 작품이 MoMA소장이어서 그런지) 이번 전시회에 관련된 작품만 구매가 가능했다.

정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아니라 대체품을 사는 것 같아서 조금 망설였지만,

그래도 좋은 작품을 만난다는 건,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 만큼 인연과 같아서

앙드레 드랭 작품 중에 나중에 집에 걸면 좋을 것 같은 작품을 하나 골라보았다.

 

André Derain. "collioure le port". France. 1905 ㅣ Troyes Museum of Modern Art

 

내가 미술작품의 프린트를 처음 산 것은, 2017년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칸딘스키의 <겨울풍경>을 처음 보고 나서였다.

당시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도 칸딘스키를 비롯해서 샤갈, 마티스 등 유명한 작가들의, 세상에 알려진 유명한 작품들이 많았는데

나는 칸디스키 작품 중에서도 아주 유명하지 않은 <겨울풍경>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기프트 샵에서 프린트화를 사왔다.

그리고 액자를 맞춰서 내 방 벽에 기대어두고는 출근할 때마다 한 번씩 바라보고는 했다.

볼 때마다, 이 작품을 만났을 때의 신선하고 따뜻했던 감동.

이미 유명하기 때문에 좋은게 아니라, 비싼 값에 팔려서 감동적인 것이 아니라,

내 눈과 내 마음에 그림 그 자체로 감동을 주었기 때문에 특별하게 느껴졌던, 나만의 애정.

그리고 그 감동을 계속 간직하고 싶어 프린트화를 사들고 온 그 날의 나에 대한 기특이 몽글몽글 솟아난다.


그 뒤로 미술전시를 보러 갈 때마다, 

여기에서 또 내 마음을 뒤흔들고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특별한 작품을 만나지는 않을까 기대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작품은 또 그렇게 쉽게 만나지는 것이 아니었다. 

남들이 좋다는 그림, 유명하다는 그림, 비싸다는 그림을 보면서 나도 이 그림이 좋아야만 하는건 아닐까 내 심미안을 다그쳐보기도 했지만

그런 다그침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역시 마음에 드는 작품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불현듯 나타나 내 마음 속 애정의 방에 콕 들어와버린다.


요즘에는 아침에 출근하면서, <겨울 풍경> 액자 위에 겹쳐 놓은 <collioure le port>를 한 번씩 바라보곤 한다. 

이렇게 마음을 담아 방에 둔 그림들은,

이제 단지 한폭의 그림일 뿐만 아니라 

이 그림을 만났던 날의 추억, 장소, 함께 했던 사람, 이 그림을 골랐을 때의 내 마음까지 

그 모든 것들이 함께 담고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영원히 이 그림을 볼 때마다 함께 생각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도 애정이 솟아나는 그림을 만나게 되기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하게 된다.

괜히 수집에 급급해서 조급하게 억지로 애정을 붙여보려 하는 것은 경계해야지.

살면서 운명처럼 마주치게 될 그림들을 기대한다.

그리고 함께 기억될 그 순간의 시간과 공간과 추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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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oney,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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