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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는 팀장님이 휴가를 가셨다.

내 뒷쪽에서 "#대리, 이리와봐" 할때마다

마치 사형장에 불려가는 죄인처럼 화들짝 놀라서

- 그러나 얼굴은 생긋 웃으며 -

쫑쫑쫑 걸어가 지시를 받곤 했다.

그게 얼마나 긴장이 되던지.

 

사실 내게 중요한 걸 시키는 것도 아닌데

쉬운 일은 쉬운 일이라 잘해야할 것 같고,

어려운 일은 어려워서 잘해야할 것 같은

결국 다 잘해야할것만 같은 압박감이 나를 누르고 있는 건 사실이다.

 

아직 날 잘 모르시니까 -

아직 난 처음이니까 -

업무적인 측면에 있어서 첫인상을 잘 남겨야 한다는 부담감.

 

그것만 빼면, 재미있고 만족스러운 회사생활인것 같다.

그것도 차차 나아지겠지.

인정을 받아가든 - 신뢰를 잃어가든 - .

그래도 전자인게 낫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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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금요일 첫 월급이 나왔다.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어 그에 합당한 대우로서 월급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인턴이나 과외를 하면서 소소한 용돈벌이를 하긴 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용돈이지 내 생활비는 아니었기 때문에...

 

이제 처음으로, 경제적으로 부모님으로부터 자립하게 된 것이다.

 

 

1. 월급통장에 돈이 들어오자마자

나는 내가 쓰고 있던 부모님 신용카드를 모두 돌려드렸다.

아빠가 이제 정말 아빠카드 안쓰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비장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이제 내가 돈 버는데 다 내 돈으로 살아야지"

 

우리 부모님은 내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도와주실 분들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냥 퍼주시기도 할거고

아니면 부모님이 먼저 비용처리를 해주고 나중에 천천히 갚으라고 하실 분들이다.

 

나는 그래서 더더욱 엄마아빠에게 기대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마음속 한켠엔, - 정말 힘들면 엄마나 아빠가 도와주시겠지-라는 1%의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

지금까지 부모님이 그래오셨고, 또 지금도 언제든 그리해주실거라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힘들면, 혹은 내 능력이상으로 무언가 필요하면 <부모님께 기대도될거야> 라는 마음 한구석 보호장치는

나라는 사람을 물렁물렁하게 만들거다.

부모님 앞에서도 물렁물렁해질 수 밖에 없을 거다.

나는 나를 그렇게 살도록 하고 싶지 않다.

어려워도 내 힘으로 극복하고, 고생하고 -

힘들면 힘든대로,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그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고 싶다.

 

아빠 - 엄마 - 그 동안 고마웠어요.

 

 

 

2. 내가 번 돈으로 내게 주는 첫 선물은, PT 트레이너비였다.

난 물건욕심은 별로 없고, 필요한게 있어도 그냥 없는 채로 잘 사는 편이라...

내가 정말 하고 싶은거 - 유익한걸 하기로 했다. 그래서 트레이너 비.

운동 열심히 배워서 건강한 몸을 만들어야지 +_+

 

 

3. 그 다음은 엄마에게 학자금을 갚기로 했다.

대학학자금중 장학금 받았던 것을 제외한 액수를 엄마에게 상환하기로 약속했었다.

월급통장에서 이번달 상환해야할 금액을 현금으로 뽑았다.

자동이체를 해도 되지만, 그래도 내가 돈 번으로 돌려드리는건데 왠지 현금을 드리고 싶었다.

회사로고가 박힌 회사봉투에 돈을 가지런히 집어넣고

To. 아빠, 엄마 - 라고 적었다.

"그동안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쓰려다가 너무 오글거려서 그 문장은 뺐다.

 

 

4. 적금 통장을 만들었다.

월급통장에서 매달 월급일에 이체가 되도록 연결했다. 

통장을 만들어서 나오는데

초등학교때 처음 통장을 만들어서 뭔가 뿌듯해하던 느낌이 스믈스믈 올라왔다.

그땐 용돈받은 걸 저금했다면, 지금은 내가 번 돈을 저금하는구나.

 

 

5. 모든 결제계좌를 내 통장으로 돌렸다.

통신비, 후원금, 보험금, 레슨비 등등

소소하게 나가는 돈들이 은근 많았다.

일일이 전화하거나 싸이트에 들어가서 바꾸는데 좀 귀찮기도 했지만

뭔가 - 첫 여행을 준비하던 때가 생각났다.

모든걸 다 내가 짜고 준비하고 알아봐야 하던 것처럼.

그러면서 누군가의 도움없이 혼자서 잘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던 것처럼

 

 

6. 그리고 곧 내 꿈을 위한 뭔가를 할 생각이다.

아주 길고 긴 장기 프로젝트가 되겠지.

부모님도 모르고 내가 믿는 오직 두 명에게만 말해주었다.

나의 아주 원대한 바람은 아니었지만

어디 자소서에 쓸정도 되는 나의 꿈이었다.

사실 내 꿈이고, 내 의지이니 안지켜도 그만이었지만

나는 왠지 자기소개서에 쓴 그 꿈을 지키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꿈"이라기보다는 "약속"과 가까운 것이다.

나는 내가 자기소개서에 쓴 나의 미래가

합격하기 위한 거짓말이 아님을 나 스스로 증명해보이고 싶다.

 

 

 

이미 돈 들어간 곳도, 돈 들어가는 곳도, 돈이 들어갈 곳도 많지만

이 모든걸 이제 내 능력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다.

그동안 부모님이 용돈 대신 신용카드를 주셔서 돈에 구애받은 적은 없지만

아무래도 내 돈이 아니다보니 항상 눈치보면서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무언의 부모님에 대한 종속이었던 것도 같다.

부모님이 이렇게 베풀어주니까 나는 대신 뭔가 포기해야해. 라는 식의.

 

 

돈 모으는 재미도, 돈 쓰는 재미도 알아가고 싶다.

벌써부터 어떻게 돈을 모으지 - 신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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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금요일에 팀장님께서 날 부르더니

회사 두 개가 합병하는 건을 내게 맡기셨다며

다른 팀들과 함께 합병을 진행하라고 하셨다.

 

 

헉....이제 입사 1개월 차인 나에게 이런거 맡기셔도 되나.....

 

 

사실 내가 말아먹을 구석이 없을만큼

이미 루틴이 다 정해져있고 많이 완성되어 있는 합병프로젝트니까 맡기신 거긴 하다. ㅎㅎ

 

 

그래도 상법책에서만 보던 회사간의 합병을 내 손으로 해보게되다니!

굉장히 해보고 싶었던건데 그걸 경험할 기회가 생겨서 굉장히 설렜다고나 할까. (두근두근)

 

변호사로서 회사에서 일하는 것과 로펌에서 일하는 것은 다양한 비교점이 있지만

회사에 있으면 어떤 프로젝트 하나를 내 손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할 수 있다.

법적인 문제만 다루는게 아니라 실제로 합병당사자들을 만나고, 다른 팀들과 의견을 조율하면서

합병 프로세스의 A to Z를 끌고 가고, 나중에 내 눈 앞에 합병된 회사를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로펌에 있으면 (아예 전체 M&A프로세스를 맡으면 모르겠지만) 대개는 클라이언트가 진행하다가 잘 모르는

법적인 문제의 부분들을 검토하고 의견서를 써서 클라이언트에게 보내게 된다.

단편적이고, 실제 상황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 있다.

 

그런면에서, 나는 로펌대신 기업의 법무팀에서 일하는게 굉장히 재미있고 매력적인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지난주 금요일에 내가 합병계약서 초안을 썼다.

그동안 회사에서 이루어졌던 다양한 합병계약서들을 기초로

이번 합병건에 맞추어 작성했는데

잘못되면 어쩌나..하는 걱정보다도 내가 합병계약서를 쓴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합병계약서 초안을 써서, 세무팀/경영전략팀/공정업무팀에 공유를 하고

나의 합병계약서가 기업결합심사신고를 위해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출된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계약검토서를 써서 올렸다.

 

 

학교다니며 책에서 배우는 것들을 내가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어느 새 아무렇지 않게 정말 해내고 있는 나를 보았다.

(비록 참조할 것들이 있어서 어렵지 않았다 하더라도)

 

 

내가 이 회사 들어와서 맡은 가장 그럴 듯한 일이었다.

앞으론 더 그럴 듯한, 더 어려운 일도 맡게 되겠지.

어렵고, 더 무거운 책임의 일을 맡으면 부담스럽고 싫기도 하겠지만

요즘 느끼는 이 일하는 즐거움, 설렘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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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긴 글을 쓸 수 있었던 이유도 - 팀장님이 휴가를 가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 - 퇴근한다. 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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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oney,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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