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회

■ 삶 2008. 12. 10. 01:15



오늘은 아마도 참으로 오랫동안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1. 면접.

난생처음으로 기업면접을 봤다. 인턴면접.
내 인생에 많은 시험관문 중에 필기시험은 많았어도 면접시험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게다가 이렇게 선생님들이 아닌 회사 면접은.

당장 면접을 보는 나보다도
처음으로 회사에 딸을 내보내는 엄마 마음이 더 떨리셨나보다.
지난 주 내내 과제와 발표에 치여사느라 잠도 못자는 나를 대신해서
정장을 사오고 매일같이 이 셔츠, 저 치마 입혀놓고 어떻게 입혀야할지를 고민하셨다.

어제도 새벽 3시까지 레포트를 쓰고 PPT를 만들고
아침에 다크써클 짙은 눈으로 일어나 토익성적표를 뽑고는
엄마가 몇 번이나 입혀보고 환불하고 교환하고 난리난리를 피운 정장을 입고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가 화장이라고 해봤자 아이라인 비뚤비뚤하게 그리는게 다였지만
오늘은 제대로 눈화장과 볼화장을 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이 녀석이 이제 다 컸네...세월이 이렇게 됐나...라는 눈빛으로 날 한참이나 바라보셨다.
엄만 오늘 내가 화장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사실.

어쨌든, 준비완료
정말이지 회사원같은 모습으로 학교에 갔다가 수업을 마치자마자 역삼동에 있는 회사로 달려갔다.
3명을 뽑는 최종면접에 11명이나 왔다. 아마 남녀 성비를 맞춰서 뽑는다면 경쟁률은 4.5~5:1정도?
대기실에 앉아 옆 사람들이 들고온 서류봉투를 힐끗힐끗 보니 죄다 서울대, 연세대....
다들 스펙 빵빵한 지원자들일꺼라고 생각하니 약간 기가 죽었지만
나도 뭐 크게 뒤쳐질껀없다고 생각하면서 나에게 주문을 걸었다


면접은 여자조, 남자조로 나뉘어서 임원진 실무면접과 토론면접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여자 5명이 함께 실무면접을 시작했다.
면접은...꽤 부드러운 분위기였지만 은근히 압박질문들이 있었고
면접관들의 질문보다도, 지원자들의 대답에서 피 튀기는 신경전이 피부로 와닿을 정도였다.
나를 포함해서 5명 모두 SKY에, 교환학생경험과 인턴경험이 있는 그야말로 쟁쟁한 지원자들이었는데
이 중에서 한 명이 뽑힌다고 생각하니 입이 바싹 타드라.

우리 조의 실무면접은 원래 예상시간보다 무려 30분이나 길어졌고
쉬는 시간도 없이 바로 토론면접으로 들어갔다.
면접관들 앞에서 지원자들끼리 토론을 했는데 토론이라기보다는 약간 의견제시에 가까웠달까-
시사문제나 답을 맞추는 문제가 아니라 독특한 문제들에 창의적이고 순발력있는 대답을 하는 면접이었는데
실무면접때보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서 부드럽게 넘어간 것 같다.


그렇게 면접은 총 한시간반동안이나 (;;) 진행됐고
토론면접까지 끝나니까 인사담당자가 우리 조는 무슨 면접이 이렇게 기냐며 신기해할 정도였다.
면접이 끝나니까 면접비도 주고; (좋은 회사로구나!)

5명의 지원자 중에 내 옆에 앉았던 이쁘고 말잘하던 연대생이 유독 눈에 튀었다.
면접관들도 그 지원자를 좋게 보는 것 같았고..
어쨌든, 나의 첫 기업면접을 (특출나게 잘 보지는 못했지만) 큰 실수없이 무사히 잘 치뤘음에 안도하면서
최고가 되지는 못했어도 최선을 다 했으니 후회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조모임을 하러 터덜터덜 2호선을 타고 학교로 돌아왔다.

#2. 지하철 2호선.

강남역에서 신당으로 오랫만에 2호선 동쪽라인을 타고 학교로 올라가고 있었다.
성내역에서부터 지하철은 지상으로 올라왔고 시간이 4시가 가까워 주황빛 노을이 전동차 안을 가득 비췄다.

덜컹덜컹 지하철이 움직이는데
정말 시간이 이렇게나 됐나 라는 생각이 울컥울컥 밀려왔다.
대학교 1학년 때, 나는 강변역에 살았고 바로 이 지하철을 타고 학교를 다녔었다.
그 때 난 말그대로 대학교 1학년.
아직 대학생으로서 해놓은 것도 없었고 나의 대학 4년이 어떻게 흘러갈지 생각도 하지 않았던 때.
정말 아직 색칠하지 않은 하얀 도화지같던 그 때.
고등학생처럼 청바지에 티셔츠 딸랑 걸치고 학교에 놀러다니며 탔던 지하철 2호선.

그 2호선을,
이제 대학교 4학년을 다 보낸 지금의 나는
청바지에 티셔츠 대신 말끔한 검은 정장을 입고, 얼굴엔 화장을 하고
학교를 떠나기 전, 기업의 인턴면접을 보고 이렇게 학교로 돌아가며 이 2호선을 탔구나.
하얀 도화지 같던 나의 대학생활을 학점으로,동아리로,공모전으로,교환학생으로,연애로 가득가득 채우고
회사의 면접관들 앞에서 나는 대학시절내내 무엇무엇을 하며 살았노라고
나와 나의 대학생활에 대해 풀어놓고는 학교로 돌아가고 있구나.

그 때 그 느낌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때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정장을 입고 회사면접을 보고 돌아오는 4학년의 나와
편한복장차림으로 친구들 만나러 학교를 가는 1학년의 내가
서로 마주앉은, 그런 느낌.


#3. 뜻밖의 만남.

신당에서 6호선으로 갈아타려는데 마주오는 사람이 어딘가 낮이 익었다.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어~?"하고 아는 체를 했더니 그쪽도 날 알아본다.
무려 3년만에 만나는 우리과 동기인 오빠.

"어? 너 맞구나? 잘 지냈어?"

2학년이 될때 그 오빠는 군대에 가고 제대할때쯤 내가 벤쿠버에 가버리면서
정말이지 3년동안 단 한번도 얼굴을 보지도 연락을 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신당에서 만날줄이야.
나 지금 4학년 2학기라 했더니, 자기 군대 갔다온 사이에 벌써 4학년이 됐냐고 시간 참 빠르다며 웃는다.

그러게, 시간 참 빠르다.
나 처음 입학했을 때, 그오빤 삼수생이었고 나는 현역이어서 엄청 오빠같아보였는데
오늘 다시 만나니까 오빤 그냥 대학생같고, 나는 회사원이 된것 같은 그런 느낌.

4년 전엔 오빠가 그냥 하염없이 오빠같아서 어렵기도 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잘지냈냐는 둥, 학교에서 보기 어렵다는 둥
마치 4년전에도 엄청 절친하게 지냈던것처럼 넉살좋게 말하고 있다니.
사실 4년 전에 어떤 일때문에 친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서먹하게 변해버리고 말았는데 그때.
나중에 다시 만나도 인사 한 번 없이 그냥 스쳐지나가 버릴 것만 같았는데.

잠깐 인사하고 헤어졌는데
그래도 오늘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장을 입고 있었고, 화장도 하고 있어서 제법 4학년인 티가 났으니까.
서로 얼굴 못본 3년동안, 완전 꼬맹이 같고 고딩같던 철부지가 이젠 제법 숙녀같이 변했다고 생각할테니까.
만약 평소처럼 컨버스에 청바지에 후드티에 어슬렁어슬렁 거리는 차림이었다면
나는 그 오빠를 알아봤어도 그냥 모른척하고 지나갔을거다.
쟤 4년전에도 저러고 다니더니, 아직도 저러고 다녀? 라는 생각은 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오늘 아무쪼록
난생 처음의 회사면접의 기억과
지하철 2호선에서 만난 추억의 감회.


성인식은 1년하고도 7개월전에 치뤘는데 나 비로소 성인이 된 것 같다.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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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oney,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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