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결혼식이 미뤄졌다. 

 

정확하게 말하면, 코로나19로 결혼식을 미루었다고 표현하는게 맞겠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코로나 확진자가 매일 100명 이하의 증가세를 보이고 있지만

이 결정을 내리는 때에는 확진자가 매일 400명, 500명씩 늘어나는 때였고 

그리고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20번대에서 멈출것 같던 확진자가 31번을 기점으로 700명, 900명씩 늘어나는 것을 지켜보며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던 사상초유의 사태에 하루하루를 걱정과 시름으로 결혼식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결혼식 두어달 전부터 청첩장을 돌리는 거라고들 했는데

웨딩촬영을 찍은 다음날인 설 연휴부터 확진자가 나오기 시작한 탓에, 

청첩을 받는 사람들에게 민폐가 되고 싶지 않아 청첩모임도 자제하고 보류하고 있었던 터라

결혼식은 가까워지는데 돌리지 못한 공들여 만든 청첩장이 방에 수두룩 쌓여서 볼 때마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결혼식을 미루는 과정은 인생에서 겪은 일 중에 손 꼽을만큼 어려운 일이었고, 

조율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탓에 급기야 사무실에서 울기도 하고, 조퇴도 하는 일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어찌어찌 잘 미루게 되었다.

(미루어서 아쉬운 점은, 원래의 결혼기념일 숫자가 좋았는데 바뀌었다는 것과 ㅠㅠ

정말 좋아하는 가수를 축가로 섭외했는데 아무래도 변경된 예식일엔 어려울 것 같다는 것과 ㅠㅠ

그리고....팬데믹 상황에서 신혼여행은 오리무중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거슨 이제 해탈함)

 

 

2. 결혼식 준비는 그야말로 고통의 나날들. 

 

낮에는 일을 하면서, 저녁과 주말의 여유시간만으로 결혼식과 신혼집 준비를 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특히나 나같이 뭘 하나 하자하면 꼼꼼하게 챙겨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에는 너무나도 지치고 피곤한 날들이었다.

게다가 나는 해야하는 일을 할때 까지는 성격상 우선순위가 밀리는 일들은 손도 대지 못한다.

 

낮에는 일을 하고,  (일하면서도 각 업체로부터 전화를 받고 스케줄을 조율 하고)

저녁에는 타임라인에 따른 잔업들을 하고, (각종 업체 리서치, 수정하기, 고르기, 문의하기 등등등)

주말에는 각종 가전제품과 가구 구매를 위해서 서울 온 동네를 방문하고 발품팔며 상담을 해야했다.

하...나 언제 쉬었대? 

그런데 또 대충할 수가 없었던 것이,

수백만원에서부터 수천만원까지 내 인생에 써본적도 없는 큰 돈 들어가는 것들을 선택해야하거나

혹은, 인생에 한번(?)뿐이라고 각오로 선택해야하는 일들이기 때문이었다.  

주중 주말 불사하고 열심히 준비했지만 불구하고 예식일이 다가올 수록 시간에 쫓기고 할일은 많아서

주중에 몇시간 못자고 허덕이는 날들이 허다했다. 

그러고나서 출근하면 너무 피곤해서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몸도 지쳐있었지만, 사실은 정신이 더욱 더 지쳐있었다. 

스드메, 결혼식, 신혼집, 예물예단, 청첩모임. 많은 일들을 한꺼번에 진행한다는게 그 자체로 쉽지 않았고,

그냥 진행되었어도 힘든 결혼식 준비를 한번 미루는 결정을 해야했으며, (후속 뒷처리 포함)

나혼자 의사결정하는 것도 힘든데, 남자친구와 조율, 우리 가족과 조율, 남자친구 가족과 조율까지.

결혼의 본질은 사랑이 아니라 조율이로구나!!! (현타)라고 수십번 생각할만큼 조율할 것들이 끝없이 밀려왔고

아무리 사이가 좋고, 예쁘게 말하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말해도 (사실 막말하지 않고 예쁘게 말하는 것도 많이 힘들다)

의견을 나누고 서로를 설득하고 때론 양보를 하면서 한가지 타협점에 이르는 과정

그 과정은 그 자체로 나에게는 정신적으로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었다.

그 과정을 수십번 반복하면서 나는 혼이 탈탈 털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오롯이 혼자서 결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자유롭고 홀가분한 일인가!!)

솔직히 남자친구를 만나는 것도 즐겁지 않았다. (남자친구야 미안하다. 하지만 남자친구 잘못이 아니다.)

결혼준비를 하는 동안 우리는 데이트가 아니라 계속 할일&협상을 해야만 했다.

궁극적으로는 서로 같이 즐겁고자 하는 일인데, 일이 되다보니 나는 즐겁지가 않았다.

즐겁지 않은게 남자친구 탓은 아니었지만, 그런 현실이 때로 버겁고 때론 슬펐다. 

나랑은 어찌저찌 의견을 통일했지만 본인 부모님을 설득하러 가겠다며 헤어질 때는 마음이 무겁고

이런 과정을 거쳐야하는 상황 자체가 나에게는 너무 고통스러운 순간들도 있었다.

스트레스와 괴로움, 그리고 피로가 누적되면서 나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나보다. 

 

 

3. 좋아하는 것을 해요.

 

결혼식을 미루고 나서, 가장 먼저 한 것은 그 동안 못다한 잠을 자는 것이었다.

열흘 가까이를 나는 거의 내리 잠만 잤다. 

결혼식 준비하면서는 불면증에 시달린 날도 많았는데, 미룬 뒤로는 초저녁부터 그렇게 잠만 잤다.

너무 초저녁부터 자느라 남자친구에게 연락을 못하고 자는 날들도 있었다. (또 미안..)

그래도 힘이 없었다. 행복하지가 않았다. 마치 방전되어 충전되지 않는 핸드폰 같았다.

결혼식 준비가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다 미루어두기로 했다.

생각했다.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자연히 드는 생각 끝에,  나는 좋아하는 것을 하기로 했다. 

그 동안, 해야만 하는 일에 치여 미루어두었던 것들.

그런데 또 오래 미루어두었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잊어버린 것 같은 그런 것들.

 

따뜻한 햇살 받으며 타박타박 산책하기. (햇살은 행복호르몬인 세르토닌 형성에 도움이 된다)

예쁜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기. (그래도 그게 취미였다고 예쁜 사진 찍으면 행복하더라)

서점에 가서 여유롭게 둘러보며 읽고 싶은 책 사기. (안읽어도 괜찮다)

아기자기한 문구용품 아이쇼핑하기. (난 그렇게 문구용품이 좋더라..)

이미 쓰고 있는 핸드크림 있지만 좋아하는 향의 핸드크림 하나 더 사기. (내게 좋은 느낌을 주는걸 하자!)

봄 느낌 가득한 신상 옷 입어보기.  (고민은 결혼준비에서 많이했기 때문에 대충 맘에 들어도 막 질렀다)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티비보기. (채널돌리기가 제일 재밌다)

엄마한테 머리 땋아달라고하기. (엄마의 사랑 느끼기)

엄마아빠 나들이 따라다니기. (엄마아빠가 같이 가자고 하지만, 실은 엄마아빠가 날 끼워주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블로그에 일기 쓰기. (글을 오래 안썼더니 없는 필력마저 다 사라진 것 같네.)

 

결혼준비하면서 기본 돈 씀씀이가 수백만원 단위였는데

내 마음에서 정말 우러나와 갖고 싶은 것을 산다기보다는, 사야하기 때문에 사야했던 것들이 많아서

(물론 가격을 따지기보다는 예산 안에서는 내 눈에 이쁜 걸 사는 짓을 많이 했음)

구매를 하면서도 썩 행복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난생처음 명품백을 샀는데, 구매과정도 너무 힘들었고 있으니 좋은건 알겠지만 그닥 행복하지는...) 

오늘 몇천원짜리, 만원짜리 내가 정말 갖고 싶었던 것들을 사면서는 짜릿하고 행복하다.

 

이렇게 내 안에 차곡차곡 작은 행복들을 쌓고 나니

이제야 마음에 힘이 생기는 것 같다. 

마음에 힘이 생기고 나니, 남자친구에 대한 마음에도 여유가 넘친다. 

그동안 나의 개인적인 행복이 바닥나 있었던 것인데,

내게 부족한 행복함을 남자친구가 오롯이 채워주지 못한다고

남자친구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그러는 과정에서 나도 스트레스를 받았던게 아닌가 반성하게 된다. 

그동안 나는 내가 해야할 일을 해야한다는 부담감과 책임감에 나를 갈아 넣으면서

나의 행복을 타인이 채워주기만을 기대했던게 아닌가, 돌아생각해본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거쳐, 얻은 올해의 깨달음은

우리는 살아가면서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살면서 모든 일의 기준이 좋아하는 일인지가 될 수는 없겠지만,

(분명 스트레스 받지만 해야하는 일들을 해내야 하기도 한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각자가 좋아하는 일들을 찾아내고

또 좋아하는 것들을 틈틈이 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 마음 속 에너지가 바닥나지 않도록, 차곡차곡 좋은 감정들을 채워넣어 줘야 한다.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 실천하는 것. 여기에도 우리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나 스스로도 행복할만큼 바로 선 뒤에, 둘 이상, 셋 이상의 관계도 건강할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결혼식은 끝난게 아니라 미뤄졌을 뿐이므로

또 어느정도 재충전을 한 뒤에는 다시 미뤄둔 일을 해야하겠지만

당분간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를 채우는 시간을 갖고 싶다.

그리고, 이 다짐을 잊지 않고 실천하며 살아야지. 

그러니까 우리, 좋아하는 것을 해요.

그리고 행복하기로 해요. 

 

 

행복한 일 하나. 영어원서 읽기 (이해도는 떨어지지만 원서 읽는 내 모습이 좋아서..)

 

행복한 일 둘. 예쁜 꽃 보기 

 

행복한 일 셋. (햇살 좋은 날 산책하기. 기미도 다 용서할 수 있다)

 

행복한 일 넷. 엄마 아빠랑 시간 보내기. 

 

행복한 일 다섯. 멋진 사진 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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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oney,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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