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이 가득 내려앉은 바이올린 (인스타에 올렸다가 송진 닦으라는 클레임을 받음)


시작은 아주 즉흥적이었다.
점심을 먹고 옆팀(이라고 해봤자 같은 사무실)에 놀러갔는데
나의 멘토였던 N팀장님께서 오보에를 꺼내 만지작 거리고 계셨다.
곧 연주회가 있어서 연습하러 가지고 오셨다고.

갑자기 왜 그랬는지, 나는 장난반 진심반으로
"제가 바이올린을 할 줄 아니 같이 듀엣 해보는 건 어때요?" 라고 제안을 했다.

"좋아!"

사실 난 여기까지만 해도 이게 정말 실현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왜냐면 내가 진짜 바이올린을 들고 회사까지 올 생각을 안했기 때문)
N팀장님의 추진력으로 순식간에 우리 법무실 내에 악기를 다룰 줄 아는 동료들을 섭외했고,
바로 단톡방이 만들어지고,
바로 팀 이름 - Quartet de Legis-가 만들어지고
바로 연주곡과 악보를 구하고
내친김에 회사 근처의 연습실까지 예약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시작된 크리스마스 캐롤 송 맹연습.
중학교 이후로 바이올린을 거의 꺼내지 않았었는데
(2020년에 큰 돈 들여서 점검받았는데 그 떄도 동기부여가 안돼서 그대로 케이스에 넣어뒀다)
진짜 오랜만에 바이올린을 꺼내서 연습이란 걸 했다.

선택한 곡의 난이도가 높지 않아서 초견으로도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정작 내 바이올린 실력이 많이(=20년) 녹슬어서 소리가 이쁘게 나지 않더라. (당연한 얘기)

그래서 연습이 가능한 주말동안 카이저 교본까지 펴놓고 기본기 맹연습을 했고,
드디어 4개 악기가 다같이 첫 합주를 했다.

 

크리스마스 컨셉에 충실한 우리들


다들 어느 정도 실력인지 알 수가 없어서 큰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완벽하진 않지만 각자 맡은 역할들을 톡톡히 해내주었고,
오랜만에 이렇게 다양한 악기가 합을 맞추어 하모니를 이루어 과정 그 자체가 너무 행복했다.

중학생 때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했었는데, 그때 기억도 새록새록 떠오르고-
오케스트라를 하면 웅장한 곡들을 할 수 있어서 좋긴 한데
개인적으로는 이런 4중주 정도가 더 좋은 것 같다.

오늘은 블랙으로 맞춘 의상 (악기연습보다 중요한 것이 컨셉)


한 번만 하고 끝날 줄 알았는데
이 사람들이 생각보다 악기 연주에 진심이었다!
(심지어 평소에 자기 의견을 전혀 내지 않는 신님도 한 번만 다시 하자고 할 정도로 적극적이셔서 깜짝 놀랐다)
내친김에 연습실을 한 번 더 예약해서 다시 한 번 합주를 했다.
확실히 연습량이 늘수록 합이 더 잘 맞는 느낌.

연주의 완성도가 아주 높진 않지만, 우리가 무사히(?) 연주를 해내었다는 사실 자체가
뿌듯하기도 하고 또 다른 것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행복함을 주기도 했다.
(출근길에 연주 녹음을 매일 들을 정도 ㅋㅋ)

 

10년을 함께한 이 능력자 동료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플룻, 오보에, 바이올린, 피아노


요즘에는 바이올린보다 첼로에 더 관심이 가서 첼로를 시작할까? 라는 생각도 있었는데
합주를 하다보니 바이올린의 간드러지는 소리에 다시 좀 매료된 것 같기도 하고.

합주를 하고서 영상을 부모님께 보여드렸는데 엄마가 되게 뿌듯해하셨다.
그 옛날에, 군인 아빠의 외벌이 월급으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두 개나 가르쳐주고
심지어 지금 내 돈으로 사라고 해도 선뜻 사기 어려운 좋은 바이올린을 사준 엄마는 무슨 생각이셨을까. (대충 감사하다는 얘기)


Anyway, 이 기분좋은 설렘과 뿌듯함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꾸준한 기회로 이어지면 좋을 것 같다.
추진력 대왕인 N팀장님이 함께 있는 한, 적어도 듀엣은 확보된 것 같으니까
바이올린 연습을 꾸준히 해봐야지!



Posted by honey,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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