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는 꼬부랑 꼬부랑 그렇게 글씨를 썼다.

한 페이지를 가득 적은 그 아이의 글씨를 보면 글을 쓴건지, 그림을 그린건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제 막 서로 알아가던 같은 과 친구들이 그 아이가 쓴 글씨를 보면서 신기해하자

그 아이는 조금 창피한 듯이 노트를 덮어버렸다.

 

"왜. 너 글씨체 특이하고 귀여운데."

 

그 아이가 민망해하는게 마음에 걸려서 나는 그렇게 한마디를 했다.

그게 64명의 동기 중 한명일 뿐이었던 그 아이가 처음으로 조금 더 가까운 동기가 되는 시작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첫사랑도, 첫 남자친구도 아니었다.

우리는 영화같이 시작해서 - 정말 영화같이 끝이 났다.

미련 한 톨 남지 않을만큼 나는 그 아이에게 최선을 다 했고, 끝나야 한다고 느꼈던 시점에서 끝을 냈다.

그 아이와의 시간은 정말이지 어떤 감정도 곁들지 않은 추억이자 내 기억으로만 남았다.

그렇게 그 아이를 만난 시간의 서너배가 되는 시간이 흘렀고

어느 날, 우연히 발견한 사진 속의 나와 그 아이의 모습은

마치 내가 아닌 것처럼,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 처럼 낯설게만 느껴졌었다.

그 아이는 그렇게 한 때 내 인생 최고의 베스트프렌드에서, 그랬었던 사실마저 거짓말같은-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 아이에 대한 마음은 사랑과 애증을 거쳐 무관심이 되어버렸다.

 

 

 

 

함께 다니던 대학을 졸업하고, 다른 대학원을 거쳐 사회에 나온지도 2년째.

10년이란 시간동안 정신없이 20대의 나를 완성해온 지금,

나의 지난 10년을 많이 되돌아보게 된다.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할수록

아주 우습게도 나는 저 멀고 먼 기억속 그 아이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 아이와의 시간이 맑고 순수했던 어린 시절이어서는 아니었다.

나에게 헌신했던 사람도, 의지가 되어줬던 사람도 그 아이가 아니었다.

그 아이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무것도 없던 나를, 지금의 내가 될 수 있는 그 기초를 만들어 주었다.

내가 몰랐던 세상을 많이 보게 해주었고, 다양한 분야로 나를 인도했고, 함께 세상을 탐험해주었다.

단편적이던 나를 다양한 넓이와 깊이를 갖게 만든 친구였다.

그건 남녀의 감정, 관계 그것에서 파생되는 것들과는 별개의 것들이었다.

 

 

 

수년의 시간이 흐르고 나니,

그 아이가 내게 주고 간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것이었나.

단순한 남녀 사이의 감정, 사랑, 소중한 추억 이런 것들이 아니라.

이제서야 뒤늦게 깨닫는다.

 

 

 

 

 

 

 

 

 

 

사람의 인연이란 초우주적인 일이란 것을 -

그 아이와의 만남과 이별을 통해 깨달아간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만나게 되는 건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 생각하니, 그 모든게 사실은 내 힘으로 하는게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가 서로를 알기 전 18년동안-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나는 그 아이가 살아숨쉬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같은 지구, 같은 하늘 아래 있지만 그 아이는 없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가 같은 학교, 같은 과를 지원하지 않았다면-

그 중에 한 명이 떨어졌더라면 -

우리는 아마 영원히 서로에게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아이와 헤어지고나서, 10년 가까이 이 서울바닥에 함께 있으면서

나는 단 한번도, 우연히 그 아이를 마주친 적이 없다.

심지어 몇년전 소개팅 했던 남자들도 우연히 마주치는 이 좁은 세상에서.

나는 그 사실을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한 때 우리는 매일 보는 게 당연한 사이였다. 그런 환경에 있었다.

오늘 안본다고 해서 내일 어디 사라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만날 수 있는 그런 시간과 환경 속에 있었다.

 

 

그리고서,

그 아이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우리가 만나기 전처럼, 다른 세계로 갈라져 버렸다.

얼굴도, 이름도, 전화번호도, 어디 사는지도 아는데, 그렇게 그 아이는 어딘가 존재하는데

내 세계에만 없었다.  

 

 

인연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었다.

사랑의 시작과 이별은 내가 결정했지만

이 생에서 아이의 세계와 내 세계가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내 결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때 그 아이를 만날 수 있었던 그 당연했던 환경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이 생각에 다다랐을때,

갑자기 울컥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찬 공기를 가르는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시절이 그리워서도, 그 아이가 보고싶어서도 아니었다.

인연이라는게, 결국은 그런 것이었다는 것에.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는것에.

그럼에도 단 한번 사는 인생, 바로 그 시절에

나의 세계와 그 아이의 세계가 만날 수 있었음이 소중하고 감사해서-

그리고 그렇게 서로에게 중요한 사람으로 스치고서

인연이 다해 서로의 세계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버렸단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어서 -

그래서 눈물이 났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아니. 이런 나의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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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oney,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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