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그러니까 15년 전 멕시코에서

 

드디어 코로나가 시작한지 3년이 다 되어 드디어 우리 집에서 확진자가 발생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목이 아프다해서 자가검진키트를 해봤더니 정말 보일듯말듯 두 줄이 떴고

병원가서 신속항원검사를 받고서는 공식적으로 확진자가 되었다. 나 말고 도리.

화요일아침부터 도리가 방에서 격리생활을 시작했고, 회사는 회사 내 전파우려 때문인지 

나까지 도리의 격리기간에 맞춰 재택을 하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갑자기 한파가 몰아닥치는데 재택이라니! 좋은데? 라고 생각했지만

이 상황에서 재택이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격리된건 아니지만, 집에 환자가 있으니 방문 너머 원격 간호(?)를 해야하고

아픈 사람한테 배달음식 먹이기가 그래서 삼시세끼 밥을 해야하다보니 식사 준비도 만만치 않고

같은 집에 있지만 그렇다고 수다를 떨 상황도 아니라 하루종일 면벽수행하는 것처럼 

집에 갇혀서 일하고 작은 거실만 종종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다. 

(물론 더 작은 방에 갇혀있는 도리는 더 힘들겠지마는, 주로 누워있으니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도 않을것 같긴하다)

 

이거랑 꼬질꼬질하고 꾀죄죄한게 무슨 상관이냐고?

나랑 상관이 있다면 있고 상관이 없다면 없는 어떤 사람의 손 사진을 보게되었는데

스킨색의 네일과 엄지손가락의 패션 링이 눈에 띄었다. (손 사진이라서 볼 게 그거 밖에 없었다)

그 뭐 네일이 대수겠냐마는, 나는 결혼식날에도 대싱디바 붙였던 사람이라 그런지

고작 손 하나 보고서도 나랑은 다른 사람이라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 사람의 손이, 그 손이 말해주는 꾸밈의 정도가 이 대한민국 다수 여성의 스탠다드 수준인데

나는 사실 그에 못 미친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미의 기준에 스탠다드가 없고, 취향의 차이가 있는 것인데도 우리나라에는 어느 정도의 기준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영 그런 것에 소질도 관심도 없다. 

회사에도 도수가 두꺼운 안경을 끼고, 화장도 하지 않고(가끔 선크림 정도), 입술색만 조금.

옷은 그냥 단정하게만 입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무릎과 발이 아픈건 싫어서 구두도 신지 않는다. 

그러다 지난 주에는 피부과에 가서 상담을 받았는데,

의사가 (본인은 진심이었던 것 같다) 매우 심각한 얼굴로

이미 유지할 수 있는 선은 넘었고 해야할 게 너무 많다며 (자신들이 추구하는 미적 기준에 부합할 수 있는) 플랜을 제시해주었다. 

이 사람이 나한테 장사하는구나..라는 느낌보다는 저 의사 눈에는 내가 진짜 한심해보이겠구나 싶었다. 

저는 결혼할 때도 피부관리를 안받았을 정도로 피부관리에 큰 관심이 없었어요~ 라며 의사를 어느 정도 안심(?)시키려 했지만

내가 타고나기를 미용에 관심이 없는 것일 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당연히 해야 할 자기관리의 부족처럼 평가하는 시선들이 너무 많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그 여자분의 손만 보고, 그냥 아무 꾸밈 없는 내 손, 그의 확장판인 나라는 존재가 먼저 떠올라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블링블링한 악세사리들을 사들이고 매일 아침 출근하기 전마다 화장대에 앉아 완벽한 얼굴을 그려낼 수는 없다. 

주말에 하루 정도, 중요한 일이 있는 날 정도는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 걸. 

그런데 이 한국 사회가 그걸 용인하지 않는다.

회사에 일하러 나갔는데,  왜 화장을 안하냐는 둥 (남자 후배가 하는 소리다)

또 반대로 다른 분들은 결혼하면 좀 퍼지던데 책임님은 피지컬이 결혼전이랑 같다는 둥 (이걸 칭찬이라고 한다) 

 

 

그러던 중에 여행은 이제 질린 줄 알았는데, 갑자기 15년 전에 멕시코여행을 하던게 떠오르면서 

한 세달간 남미를 배낭여행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매년 2주씩 해외여행을 해왔지만, 2주는 너무 짧다. 준비하는데 두달 걸리는데 2주라니.

외국가서 시차적응하고 어쩌고 하고나면 바로 또 집에 돌아가는 날에 가까워져버린다. 

최소 두달은 해야 돌아가야 한다는 압박도 잊고 지금 내 삶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그정도 여행하려면 무거워서 옷도 많이 싸짊어지고 가지 못한다. 

가용도 높은 옷 몇벌을 열심히 믹스매치해가면서 (너무 추울땐 패션도 포기하고 다 껴입어가면서) 여행하는거다.

15년 전에 여행할땐 같이 여행하는 친구들하고 옷을 바꿔입어가면서 여행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장기 배낭여행을 하다보면 햇빛에 노출되는 시간이 길어져서 

손도 누렇게 타고, 얼굴도 한 톤 어두워지고 눈가에 기미가 생기기도 한다.

처음에는 기미 생겨서 어떡하지, 한국가서 레이저로 지워지나 이런 생각하다가

그마저도 여행이 길어지고 내가 한국의 삶, 한국 사회가 부지불식간에 밀어부치는 그 기준과 동떨어진 곳에 있다고 생각하면

이제 될대로 되라지 싶다가 어느 순간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내가 좋아지는 순간이 온다

햇빛에 그을러서 까무잡잡하고, 옷도 어딘가 어설프지만 

그냥 이 모습으로 있을 수 있어서, 지금의 내가 - 바로 나라서 좋은 그런 순간이. 

상상 속의 여행지를 남미로 택한 것도, 한국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유럽만 가도 이제는 배낭여행이 아니라 화보여행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인스타그램 속에, 어찌나 잘 차려입고 명품백을 들고서 나 이렇게 남부러운 삶을 누려요~라고 보여주는 사진과 영상들이 많은지. 

여행지에 가서 아침부터 일어나 머리를 세팅하고 화장을 곱게 하고 완벽한 모습으로 예쁜 내 모습을 남기러 가는 그런 여행 말고, 또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곳 말고. 

오래오래 걷고, 바닥에 풀썩 앉고, 옷을 주섬주섬 껴입고, 이 여행이 여기서 끝이 아닌 것처럼 여행하는 여행자이고 싶다.

꼬질꼬질하고 꾀죄죄하게 여행하고 싶다. 아마도 나는 그런 나를 그 어느 떄보다 좋아할 것이 분명하다.

(그 곳에선 그럴 일도 없지만)화장 좀 안해서 지적질 좀 당해도 괜찮다.

네일 좀 안한다고 내가 덜 꾸미고 산다고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꼬질꼬질하고 꾀죄죄해지도록 여행하는 나.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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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oney,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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